오정일 경북대 교수회 의장
우리나라 '상법 382조 3항'은 이사의 충실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사는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이 조항에 주주를 넣으려고 했다가 난리가 났다.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나 당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와중에 금융감독원장과 금융위원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이사는 회사와 주주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법원은 이사는 회사를 위해 일하면 된다고 했다. 그 근거는 이렇다. 회사의 이익이 곧 주주의 이익이므로, 이사가 회사 이익을 추구하면 당연히 주주 이익이 보호된다. 그러니 '상법 382조 3항'에 주주를 넣을 필요가 없다. 이런 의문이 든다. 법률 조항에 단어 하나 넣는 것이 큰일인가? 기를 쓰고 주주를 넣지 않으려는 이유가 뭔가?
재계(財界)는 '상법 382조 3항'에 주주를 넣으면 이사가 주주 눈치를 보느라 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사가 주주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 회사의 주인은 주주, 이사는 대리인이다. 수많은 사람이 투자한 상장기업은 '주인·대리인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이사가 주주 이익 대신 자기 이익을 꾀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심각하다.
이사는 회사와 주주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 주주만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주주만큼 다른 이해관계자도 중요하다. 기업은 이윤 창출 외에 사회적 서비스 기능을 수행한다. 이사는 주주, 직원, 소비자, 공동체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 요즘 'ESG 경영'이 유행이다. 대세(大勢)는 '이해관계자 우선주의'다. '주주 우선주의'는 한물이 지났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주주 우선주의'도 실현되지 않았다.
'상법 382조 3항'을 개정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 지배구조는 다른 선진국과 다르다.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85%는 지배주주가 대표이사이고, 대표이사 가족이 이사회를 장악한다. 지배주주가 자기 돈으로 주식을 사들여서 대표이사가 된다면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지배주주가 자기 돈을 쓰지 않고 합병, 분할, 주식 발행으로 경영권을 강화하니 문제다. 이 과정에서 일반주주의 이익이 침해된다. 우리나라에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는 사실 '지배주주의 일반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다.
삼성은 지배구조가 복잡한 회사다. 많은 계열사가 '순환출자'로 엮여 있다. 삼성물산을 지배하면 알짜 회사인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물산 지분이 거의 없었지만 제일모직 지분은 많았다. 그래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쳤다. 제일모직 1주와 삼성물산 3주를 교환했다. 삼성물산 가치가 너무 낮게 평가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2015년 합병 이후 삼성물산 주가는 많이 내려갔다.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올해 2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자신의 계열사들이 보유한 한화오션 지분을 사들였다. 이 계열사들은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 소유(所有)다. 한 달 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3조 6,000억 원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 '유상증자'로 주식 수가 늘면 일반주주 지분이 희석(稀釋)된다. 일반주주들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김승연 회장 가족의 지분 정리에 돈을 다 썼다고 의심한다. 금융감독원장도 "제일 큰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맸다"고 했다. 이러한 의심은 합리적이다.
이사는 회사와 주주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뻔한 조항이 효력이 있을까? 법 조항에는 '표현적 효력'이 있어서 그 자체로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을 변화시킨다. 판사의 단순한 권고도 효력이 있다. 예를 들면, 계약은 신의(信義)에 따라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신의, 성실은 그 의미가 분명치 않다. 그렇더라도 판사가 '신의성실' 원칙을 지키라고 하면, 사람들은 계약을 잘 이행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와 대만 TSMC의 매출 차이가 10조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얼마 전 삼성이 임원 2천명을 대상으로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을 했다. 이재용 회장은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못 비장한 말이지만 일반주주들에게는 울림이 없다. 이재용 회장은 대표이사이자 지배주주다. 지배주주의 이익이 곧 일반주주의 이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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