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이면 물 반 사람 반, 대구시민의 안식처
1960년 5월, 동촌의 휴일은 물 반 사람 반. 살랑살랑 봄바람은 선남선녀를 불러들이고, 놀이터에 굶주린 어른들도 여기가 손꼽는 유원지라고 동촌으로 동촌으로 쏟아졌습니다. 잔잔한 강물에 날씨마저 청명해 노를 젓는 청춘, 유람선에 몸을 실은 중년, 나들이객을 잔뜩 태운 뱃사공 모두 신바람이 났습니다.
저 무렵 동촌은 대구 도심에선 멀고도 먼 '교외'. 털털거리는 합승버스로, 말쑥한 신사들은 택시로, 촌로들은 동촌역까지 대구선 열차로 왔습니다. 유원지로 드나드는 지름길은 동촌 나루. 당시 유원지 주변 효목동엔 변변한 도로가 없다보니 동촌에서 뱃사공이 긴 장대로 나룻배를 밀어 사람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아리랑호, 갈메기호 등 이 무렵 유원지 나무 보트는 모두 140여 척. 나무 보트로 한 시간 노는 데는 2백환(20원). 뱃놀이는 청춘들의 최고 데이트였습니다. 1959년 처음 설치된 케이블카 탑승료는 50환(5원). 난생 처음 하늘을 나는 재미에 해가 저물도록 줄을 이었습니다.
이곳이 유원지로 개발된 건 일제강점기 때 부터. 유원지 서남쪽 절벽 아래엔 봄마다 벚꽃이 환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유원지로 조성하면서 심은 것이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유림들이 정자를 짓고 낚시를 즐겼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이곳까지 찾아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까지 나왔다는 평양 출신 부부도 있었습니다.
1954년, 평양 부부는 유원지 최초로 제방 둑에 '공원다방'을 열었습니다. 유성기로 연일 '굳세어라 금순아' 를 틀어대자 손님이 들끌었습니다. 내친김에 부부는 유원지에 '베이비 골프장'을 열었습니다. 198㎡(60평) 작은 터에 올망졸망하게 들어선 12개 코스는 동촌 최초 유기장(遊技場). 일제 때 유행하던 시설을 재활용한 것으로, 신사는 물론 젊은 인텔리 여성도 줄을 이었습니다.
1960대 들어서자 그야말로 유원지 다운 면모를 갖췄습니다. 케이블카에 이어 1963년 회전그네, 회전관람차 등이 보강되고 1968년엔 유원지 내 9천917㎡(3천평)에 큼직한 사설 야외 수영장도 문을 열었습니다. 그해 완공된 구름다리는 동촌의 명물로, 구름인파를 불렀습니다.
"20만 시민과 택시들이 죄다 교외로 나가 도심은 텅텅…." 1969년 6월 첫 휴일 동촌은 무려 10만 인파. 유원지 행 버스는 정원 초과가 예사. 음식점 가격표는 있으나 마나, 뱃놀이는 1시간을 연장해 오후 8시 30분까지, 강물에 둥둥 떠 '밤의 홍콩'으로 불리던 해월선, 크라운장은 내온 불빛을 질펀하게 쏟아냈습니다.
동촌 유원지 최고 전성기는 1970년대 초. 강변 12개 보트장에는 보트가 3백60여 대, 유람선도 10여 대에 달했습니다. 여관은 40여 곳, 꾕과리·장구를 준비한 술집이 60여 곳, 음식점은 70여 채나 들어섰습니다. 바위꾼도 부쩍 늘어, 행락객들은 어리숙한 속임수에 속절없이 당하며서도 쉬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동촌의 일미(一味), 잔고기 조림은 더는 맛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고속도로 개통(1970년)과 함께 화랑교 건설, 산업화 여파로 수심이 얕아지고 수질마저 탁해져 그 많았던 물고기도 하나 둘 떠났습니다. 또 유원지 건너 둔치가 잔디밭으로 개발돼 즐비하던 포장마차도 싹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제 다시 금호강 르네상스. 동촌 유원지가 부활을 꿈꾸고 있습니다. 최고 경쟁력은 자연으로의 부활과 재생. 금호강에 다시 물고기가 떼를 짓고, 조각 구름이 쉬어가던 미루나무 숲도 복원되고, 호젓한 옛 나무 보트에, 단오날이 즐겁던 쌍그네도 다시 뛰어보고…. 그런 날이면 대구 여름이 재아무리 덥다 해도 동촌 강바람을 이길 순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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