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변곡점마다 민족 독립·민주화 투쟁…여성 인재 산실의 요람 '경북여고'

입력 2025-04-22 06:30:00

여자 중등학교 설립 필요성에 지역민 '십시일반'
대구경북 첫 '자율형공립고' 미래 인재 양성 총력

경북여고 전경. 경북여고 제공
경북여고 전경. 경북여고 제공
2012년 개관된 경북여고 역사관. 김영경 기자
2012년 개관된 경북여고 역사관. 김영경 기자

대한민국 여성 인재의 산실 경북여자고등학교가 내년 4월 15일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다. 경북여고는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평양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세 번째로 개교한 공립여고다.

학교는 개교 이래 4만2천여 명의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며 나라의 발전에 초석을 다져왔다. 세계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훌륭한 여성 지도자를 길러내며 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셈이다. 경북여고는 지난 15일 개교 99주년 기념식을 갖고, 현재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1926년 개교한 경북여고 1회 입학식 모습. 경북여고 제공
1926년 개교한 경북여고 1회 입학식 모습. 경북여고 제공
1949년 경북여고 본관 전경. 경북여고 제공
1949년 경북여고 본관 전경. 경북여고 제공

◆여성 교육·인재 양성의 요람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많지 않았다. 대구 지역엔 대구여자보통학교, 희원학교, 명신여학교, 달서여학교 등이 있었지만 모두 초등 과정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이 진학할 수 있는 상급학교는 신명여학교 외에 없었다. 1924년 지역 유지들 사이에서 여학교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며 공립 중등여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됐다.

기성회는 당국에 여학교 설립을 거듭 요청했지만 총독부는 학교 설립 조건으로 5만원의 민간 기부금을 요구했다.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25억~30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모금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기성회에서 2만4천원을 모금하고 당시 경일은행 총재 장길상 씨(1만3천원) 등 대구경북 지역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5만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경북여고는 1926년 4월 15일 대구 중구 장관동에서 임시 교사로 문을 열었다.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대구여고보)'라는 이름으로 개교해 전국 각지에서 1, 2학년 학생들을 동시 선발했다. 당시 1학년은 120명 모집에 195명이, 2학년은 40명 모집에 56명이 지원했다. 입학시험은 3일에 걸쳐 시행됐다. 각 도별 지원자는 경북이 제일 많았고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충청남북도 순이었다.

경북여고가 현재의 남산동 교사로 옮겨온 것은 이듬해인 1927년이었다. 초대교장으로 일본인 백신수길이 부임해 16년간 재직하며 학생들의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학생들의 교과수업은 수신, 공민, 국어(일본어), 조선어, 역사, 지리, 수학, 가사, 재봉, 음악, 체조 등으로 편성됐다. 재학생들은 학업뿐만 아니라 예체능 분야에서도 발군의 실력으로 전국적 명성을 떨쳤다. 수예(자수) 작품 전국대회 공모전에서 5년 연속 특상을 수상하고, 탁구·정구부는 1929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전국대회에서 우승·준우승 성과를 거뒀다.

학교는 해방 후 나타난 사회 전반의 혼란 탓에 학제와 학칙이 변경되면서 교명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38년 경북공립고등여학교, 1946년 경북여자중학교(6년제), 1951년 경북여자고등학교, 1952년 대구여자고등학교로 개칭됐다가 1953년 경북여자고등학교로 다시 환원돼 오늘에 이른다.

경북여고하면 떠오르는 세로 흰 줄이 부착된 교복 치마는 학교 자긍심의 표상이 됐다. 당시 교복 치마에 그어진 흰 줄을 보고 사람들은 '흰 칼을 찼다'고 부러워하며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1934년 건들바위 앞에서 찍은 사진. 경북여고하면 떠오르는 세로 흰 줄이 부착된 교복 치마는 학교 자긍심의 표상이 됐다. 경북여고 제공
1934년 건들바위 앞에서 찍은 사진. 경북여고하면 떠오르는 세로 흰 줄이 부착된 교복 치마는 학교 자긍심의 표상이 됐다. 경북여고 제공
2·28민주운동 기념 시비(詩碑). 경북여고 32기 장영향 시인의 시
2·28민주운동 기념 시비(詩碑). 경북여고 32기 장영향 시인의 시 '푸르른 이름 2·28'이 새겨져있다. 김영경 기자

◆역사 변곡점마다 눈부신 활약

일제 식민지와 해방, 6·25전쟁, 독재, 민주화 등 역사의 변곡점마다 경북여고 학생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학생들은 청(淸), 명(明), 직(直)의 학교 가르침에 힘입어 민족의 독립과 여성의 지위 향상에 영향을 끼쳐왔다.

1928년 일본인 역사 교사를 배척하며 수업 거부, 동맹 휴학한 사건이 있었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발발 땐 전교생이 수업 거부 등으로 항일 투쟁에 동참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거나 휴교라는 극단의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4학년 이옥희(2회) 씨는 동맹 휴업의 주동자로 지목돼 곤욕을 치렀고, 우리나라 최초의 종군기자인 소설가 장덕조 씨도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하는 격문(檄文)을 썼다가 퇴학당했다.

또 일본 군대가 주둔한 대구 보병80연대 정문과 대구역에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을 배포한 학생들이 검거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이순이, 김수봉, 백순조 등의 학생들이 시위 주도와 맹약서(盟約書) 작성 혐의 등으로 대구 경찰에 검거됐다.

집권 정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선거 및 사회에 만연한 부패 사상은 당시 지식인 계층이었던 학생들의 의분을 샀다. 1960년 2월 28일, 이승만 정권이 야당 부통령 후보의 대구 선거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리자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했다. 2·28민주운동 당시 거사를 일으킨 8개 학교 중 여학교는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두 곳이었다.

경북여고 학생들은 2월 27일에 28일 일요일 등교 지시를 받았고, 분노 속에서 일요일에 등교한 학생들은 각 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리로 나가려 했다. 학교 당국은 다른 학교들의 데모 소식에 놀라 교사들을 전부 동원해 정문을 막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했다. 저녁이 되자 학생들은 정문에서 뛰쳐나와 각기 분산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1백여 명의 학생이 교사들의 제지를 뚫고 시위 중이던 대구여고 학생들과 합세했고, 민주당 강연회가 열리고 있던 수성교를 향해 대열을 지어 행진했다. 삼덕우체국 앞에서 대열은 해산됐고 약 30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됐다.

2012년 개관된 경북여고 역사관. 경북여고 제공
2012년 개관된 경북여고 역사관. 경북여고 제공
경북여고 운동장 동편에 있는 100년의 유서 깊은 너럭바위와 돌집. 경북여고 제공
경북여고 운동장 동편에 있는 100년의 유서 깊은 너럭바위와 돌집. 경북여고 제공

◆자율형공립고 선정 명문고 재도약

경북여고는 지난 2009년 전통·명문 여고의 위상을 되살리기 위한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수성구가 아닌 곳에 위치한 탓에 학력 신장에 어려움을 겪는 학교의 위상을 살리고자 대구경북 최초로 자율형 공립고(자공고)에 응모, 지정되는 성과를 냈다.

자공고는 지역의 교육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시도별로 자율적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공립 학교를 의미한다. 자공고가 되면서 경북여고의 열악한 교육환경이 보완됐고 교사와 학생들의 열의도 높아졌다. 이 같은 성과를 토대로 2014년에는 자공고로 재지정됐고, 2014년 학교평가 최우수학교, 2015년 제13회 전국 100대 교육과정 최우수학교로 선정되는 결실을 거뒀다.

교육부가 2020년 자공고를 폐지하며 잠시 운영이 중단됐으나, 지난해 2월 '자율형 공립고 2.0'을 다시 선정하며 5년간 자공고로 재지정됐다. 경북여고는 매년 교육부·교육청 대응 투자로 2억원을 지원받고 일반고와 차별화될 수 있도록 교육과정, 교장·교사 임용 등에서 자율성을 부여받을 예정이다. 현재 협약을 체결한 대학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한 대학 연계 진로학업설계 특화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문웅열 경북여고 교장은 "경북여고는 굴곡진 역사를 거치며 각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룬 인재들을 많이 배출해 왔다"며 "내년 개교 100주년을 재도약 원년으로 삼아 학교가 쌓아온 전통을 바탕으로 미래 인재를 양성할 청사진을 그려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도움말 석귀화 경북여고 역사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