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으로 다시보는 그때 그사건
무비자 중국인, 제주 묻지마 살인사건…징역 30년
2016년 9월 어둑한 아침빛이 스며들던 제주시 한 성당 예배당에는 오직 기도하던 60대 여성의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중국인 천궈루이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가방 속에 숨겨둔 흉기를 조용히 꺼냈다. 찬송가 책과 우의로 흉기를 감춘 채 예배당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피해자와 눈이 마주친 바로 그 순간, 침묵은 절단됐다.
◇'내 머릿속에 칩'…망상빠진 중국인, 범죄 저지르려 제주행
중국 국적의 천 씨는 오래전부터 망상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중국 정부가 자신의 머릿속에 칩을 심어 고통을 준다는 등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망상은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외국에서 중한 범죄를 저질러 수감되겠다"는 극단적인 결심으로 이어졌다. 일본행 비자가 발급되지 않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제주도가 범행 장소로 선택됐다.
2016년 9월 13일 제주공항에 도착한 그는 이틀 동안 호텔과 주변 지역을 오가며 범행 대상을 찾았다.
15일 오전에는 호텔 근처 마트에서 흉기를 구입했고, 그날 밤에는 성매매 업소와 주택가를 배회했으나 마땅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인 16일에는 범행 장소로 교회와 성당을 물색했다. 교회나 성당에서는 범행을 해도 신이 자신을 용서해 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그는 내부 구조를 살폈고, 찬송가 책을 훔쳐나오기도 했다.
이후 택시기사에게 "제주에서 제일 큰 성당으로 가 달라"고 요구해 도착한 곳이 바로 범행을 저지른 성당이었다. 천 씨는 성당 내부를 둘러보다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로 실행을 미루었으나, 오후에 다시 방문해 출입구와 구조, 도주로를 미리 확인했다.
이틀 동안 준비해 온 범행은 17일 오전 현실이 됐다. 천 씨는 우의를 구매한 뒤 전날 봐둔 성당으로 향했고, 8시 47분쯤 예배당 문을 열었다. 피해자는 미사 준비를 위한 봉사를 마친 후 홀로 성당 앞쪽 의자에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피해자가 혼자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본 그는 즉시 범행을 결심했다. 그는 가방에서 흉기를 꺼낸 뒤 우의와 찬송가 책으로 가린 채 천천히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피해자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범행을 저질렀다. 이어 방어하려는 피해자를 여러번 흉기로 찔렀고, 피해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예배당 출입구로 달려 나가 흉기를 던져두고 성당을 빠져나갔다.
피해자는 흉부와 옆구리, 대퇴부에 각각 깊은 상처를 입었다. 우측 흉부 상처는 늑골을 절단하고 폐·횡격막·간을 관통해 깊이 약 18cm에 달했다. 옆구리 상처 역시 횡격막과 간, 신장을 관통해 깊이는 약 11cm로 확인됐다. 피해자는 피를 흘리며 자신의 휴대전화가 있던 자리까지 이동해 119에 신고했으나, 다음 날 새벽 제주시의 병원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범행 직후 천 씨는 모자와 우의, 찬송가 책 등을 길가에 버렸고, 중국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해 로밍된 휴대전화를 제주로 가져오라고 하며 자신이 쓰던 휴대전화는 호텔 화단에 버렸다. 이후 택시를 타고 제주국제공항에 들렀다가 서귀포시로 이동하며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사건 당일 오후 서귀포 보목동의 한 식당 화장실에서 체포됐다.
◇궤변 늘어놓으며 반성 없어…징역 30년 확정
수사 과정에서 천 씨는 범행 동기를 두고 일관되지 않은 진술을 반복하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혼한 아내들이 모두 도망가 여자가 종교가 있다고 착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성이 약하고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하여도 예수님이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해 아무런 이유 없이 칼로 찔렀다"
"중국정부가 머릿속에 칩을 심어놓아 자신을 조종하고 신체적인 고통을 주므로, 한국에서 감옥에 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
"나는 신이며 2030년 인류가 멸망한다고 보았다. 감옥에서 어떤 문을 만들어 사람들을 데리고 지구를 탈출하기 위해 범행했다" 등이었다.
피해자나 유족에게 죄책감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피해자가 희생됨으로써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취지로 말했다.
법원이 의뢰한 정신감정에서 천 씨는 사고의 융통성 부족, 경직성, 강한 집착, 피해·관계망상, 충동조절력 저하 등을 보이는 망상장애로 진단됐다. 범행 당시에도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제출됐다.
그러나 계획적이고 집요한 범행 준비 과정, 도주 경로의 조작, 반성 없는 태도 등은 양형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극심한 충격과 슬픔 속에서 천 씨에 대한 최고형 처벌을 요구했다.
법원은 심신미약 감경을 적용해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동기와 경위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고한 피해자를 살해하여 피해자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았다"며 "이 사건 범행은 불특정 피해자를 대상으로한 '무작위 살인'이고, 그로 인해 사회 전반에 큰 불안감이 조성됐다"고 판시했다.
1심 선고 당일 재판정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차분한 모습을 보이던 천 씨는 형을 선고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다 '억!'소리를 내며 쓰러진 뒤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드러누웠다. 이후 대기실에서 깨어난 천 씨는 판결에 불만을 보이며 난동을 부렸다.
당시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온라인상에 무사증(무비자) 입국 제도를 폐지하자는 청원운동이 일어났고, 만 하루 만에 서명자가 1만명을 넘어서는 등 중국인 관광객들에 대한 국내 반(反)감정이 극에 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