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윤정훈] 화려하고 잔인한 세계, 유통업계

입력 2025-03-26 16:07:39 수정 2025-03-26 17:58:37

윤정훈 경제부 기자

윤정훈 경제부 기자
윤정훈 경제부 기자

유통업계는 화려하고 잔인하다. 지역 한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와 차를 마시며 유통업계의 이모저모를 전해 들었다.

인상적인 이야기 중 하나는 일부 백화점 남자 직원들은 정장 한 벌을 여분으로 갖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정장을 입은 채로 창고에서 무거운 박스들을 옮겨야 할 일이 많아 옷이 더럽혀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물건을 옮기는 그 짧은 순간까지도 고객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프로 의식, 그 의지의 표상이 '정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좋게 보임으로써 좋은 느낌을 남기는 것'의 중요성, 즉, 포지셔닝과 브랜딩이 이 업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조금 슬픈 이야기다. 경기가 호황인 시절엔 백화점 행사에서 '아파트' 한 채를 경품으로 내놓았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1990년대 후반에 게재된 관련 기사를 찾은 뒤에야 믿을 수 있었다. 심지어 한 곳도 아니고 꽤 여러 백화점에서 그러한 고가 경품 이벤트를 진행했었다.

경품으로 '아파트'를 선물한 백화점. 나라면 평생 그 백화점만 다니며 지조를 지킬 것이다. 그렇게 말했더니 관계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막상 사람이 또 그렇지 않더라. 더 좋은 곳이 생기면 그곳으로 가게 돼 있다"고 말했다.

이 두 이야기를 듣고 유통업계가 지닌 화려함과 잔인함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홈플러스 사태가 터졌다. 한국 굴지의 대형마트인 홈플러스가 자금난으로 파산 위기에 처해 법원에 회생 신청을 했다. 충격이었다. 대구 동구 주민으로서 홈플러스 동촌점이 과거 '까르푸'에서 '홈에버'로, 그리고 지금의 홈플러스가 될 때까지의 모든 변화 과정을 지켜보며 자라 왔기에 더욱 그랬다.

홈플러스 최대주주인 MBK파트너스의 경영 실패를 지적하기에 앞서 이 상황을 바라보는 동종업계인들의 현 심정이 궁금했다.

그중 또 다른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옛날엔 전통시장을 지키기 위해 대형마트를 규제했는데, 지금은 누가 대형마트를 지켜줍니까."

당시 기사에 싣진 않았지만, 상당히 무겁게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소비 트렌드는 인터넷 발달과 함께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서서히 옮겨 왔다. 그러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무게추는 온라인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시장의 무서운 성장세가 그 방증이다. 최근엔 소위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로 대표되는 C커머스가 가격 경쟁력을 앞세우며 국내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전통시장에서 대형마트로, 대형마트에서 온라인 앱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 정(情)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을 끌어오기 위해 시장도, 대형마트도, 이커머스 업체도 저마다 사활을 걸고 쇄신을 거듭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대형마트에 적용되고 있는 의무 휴업일, 새벽 배송 제한 등 규제는 그대로라 쇄신의 걸림돌이 되고 있단 점이다.

대형마트 의무 휴업일을 주말에서 평일로 바꾸자, 주변 상권 평균 매출이 3.1% 상승했다는 산업연구원의 연구 결과도 나왔다. 누구를 위한 규제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화려하고 잔인한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변화는 필수다. 변화를 위한 변화가 필요하단 걸, 이번 사태를 통해 규제 당국이 느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