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 다산북스 펴냄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https://www.imaeil.com/photos/2025/03/19/2025031913593509694_l.jpg)
내 여자 친구가 나와 친한 녀석과 사귀기 시작했다. 그때 친구들 모임에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면서 평균의 삶에 만족하는 나와 달리 녀석은 예리하고 논리적이고 염세적이며 시니컬한 엘리트였으니 그녀가 녀석에게 빠질 만도 했다. 녀석이 내게 자신들의 교제사실을 알려왔을 때, 흥분과 자괴감에 빠졌지만 나는 불화를 원치 않는 성격이라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고 믿었다.). "본인은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명시하고자 상찬과 기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네, 벗이여." 정말, 나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누구나 기억의 오류를 경험한다. 심지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던 사람도 기억이 똑같지 않다.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윤색되거나 편집된 기억을 사실로 믿는다. 개인의 기억(추억)이 공적 역사가 되기 위해 오랜 시간 엄정하고 까다로운 검증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쳐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하물며 젊은 시절의 일을 노년이 되어서도 정확하게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터. 만약 누군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일지도 모른다.
줄리언 반스에게 맨부커상을 안겨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기억의 윤색에 관한 잔혹한 드라마다. 두 개의 챕터로 나눠진 이야기는 1부에서 화자 토니 웹스터를 중심으로, 여자 친구 베로니카와 단짝 친구들의 학창시절을 다루면서 이들의 캐릭터를 설명한다. 2부는 만년의 토니가 베로니카의 엄마 사라 포드로부터 받은 500파운드의 유산과 편지로 시작되는데, 전후 내막을 파헤치는 동안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기억의 조작을 만난다.
화자인 토니는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기억을 조작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면서 콤플렉스 가득한 인물이다. 자신의 전 여자 친구와 사귀게 된 사실을 알린 친구의 편지에 답장하면서, 갖은 증오와 저주 섞인 말을 쏟아내고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노년이 돼서 다시 만난 베로니카와 동생의 관계를 자의적으로 유추하고 해석하면서 엉뚱한 답에 이르고 서둘러 결론 내리기 일쑤다. 줄리언 반스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 남자의 인생 위에 5~6명의 여성을 배치하는데 이들은 토니 웹스터의 캐릭터(남성 중심적 사고를 가진데다 무례하고 몰인정하면서 교양 없는)를 방증하는 역할로 동원된다.
기억의 편집과 망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일. 비록 친근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유독 토니가 자신의 행위로 인해 혹은 베로니카에 의해 무책임하고 반성 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는 점은 의아하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토니의 행동양식이 유별나게 수사될 이유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우연히 접하게 된 유의미한 논문(충실성이 원본을 배신할 때)에서 저자는 "한국의 직역주의가 서구 원본에 대한 경외심과 관련 깊다."고 진단하면서 직역과 충실성이 원본의 작품성을 훼손하고 원본을 배신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기억의 편집과 윤색에 관해 공통의 체험을 소환하는 빼어난 작품이다. 마지막 쪽에 도달해서야 전모를 밝히는 반전은 평면적 인물들의 감정놀음을 일거에 청산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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