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기회균등(equal opportunity)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기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이다. 나아가 기회균등은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기본 과정으로 보고 있다.
기회균등에 대한 이 의미가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 바로 그 이름도 희한한 '블라인드 채용'이다. 정부는 공무원을 비롯한 모든 공기업, 공공기관 등의 채용 과정에서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여 공정한 과정을 보장한다는 목적으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
지원자의 학력, 출신지, 가족관계, 신체 조건 등 공무를 수행하는 직무와 상관없는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그 사람의 직무수행 능력만으로 평가하는 채용 문화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은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모든 공공기관에 시행하고, 이후 지방공기업까지 확대되었다.
이 제도의 뿌리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했던 고전 자유주의자들로, 기존에 귀족 계급이 독점하던 공무원 임명 기회나 국가 시설 이용권을 요구한 것에서 출발한다. 즉, 순수하게 공직에만 적용되는 원칙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2019년 정부는 원래 채용 서류 반환이나 취업 사기 방지 정도를 담고 있던 '채용 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또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개정한다.
상시 30명 이상 근로자를 사용하는 민간업체의 채용 절차에도 블라인드 채용을 적용하도록 규제의 폭을 확대한 것이다. 이는 기업이 자기 조직에 적합한 인재를 뽑는 데까지 정부가 간섭하는 매우 나쁜 사례로 남을 것이다.
정부와 일부 사람들이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아름다운 구호를 주장하면서 내세우는 기회균등을 쉽게 표현하면 달리기 경주에서 승리하려는 이들을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이들은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여행 과정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정지된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적한다.
개인의 현 위치는 그의 땀과 노력 그리고 과거의 결과물이 반영된 것이다. 만약 '현재'를 출발선으로 삼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미래의 기회를 제공하려면, 그들이 쌓아온 경험과 학습의 장점을 모두 박탈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떤 사람의 현재의 모습은 그의 과거가 축적된 결과이다. 과거를 모조리 무시하자는 주장은 기회균등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으로 세상을 날로 먹으려는 속셈과 다르지 않다.
영어의 블라인드(blind)는 기본적으로 눈이 멀어 앞이 안 보인다는 뜻이다. 어떤 영문 사전을 찾아봐도 이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도대체 블라인드인 상태에서 그럼 무엇으로 사람을 뽑겠다는 것인가. 결국 채용 현장에서 평가자가 볼 수 있는 것은 후보자의 생김새와 말솜씨 정도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그동안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채용에 유리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느라 힘든 노력을 했어도 아무 소용이 없고, 인물 좋고 말솜씨 좋은 후보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 현 블라인드 채용 제도다. 이렇게 인물과 말솜씨로 채용되니 젊은이들은 공부를 하고 실력을 쌓는 대신 성형과 글쓰기와 스피치 학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기회균등 사회'인가!
정부 정책은 그 목적이나 의도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물로 평가된다. 물론 과정도 평가의 대상이 되지만 성공적인 정책이 되려면 정책의 효과, 즉 결과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정책의 취지가 좋아도 성과가 없는 정책을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책은 '공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정책과 사업이 구상되어 입안 및 집행되는 모든 정치적, 행정적 과정에 관련자들의 시간과 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상당한 예산과 비용이 든다. 현재 블라인드 채용은 학벌이나 스펙보다 실력을 평가하여 선발의 공정성을 확보한다는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현행 블라인드 채용 제도를 전면 재검토하고 민간 부문까지 확대한 규제를 철회해야 한다. 살면서 온갖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명심하는 경구 중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의 소망은 앞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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