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85>한가로이 산 속에서 담소하다

입력 2025-02-12 10:24:34

미술사 연구자

강세황(1713-1791),
강세황(1713-1791), '초옥한담도(草屋閑談圖)', 비단에 담채, 58×34㎝, 리움미술관 소장

'초옥한담도'는 강세황의 만년작이다. 산중으로 피서를 나온 두 분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여름날 풍경을 스스럼없는 붓질과 슴슴한 담채로 그렸다. 제화는 중국 명나라 철학자 왕양명의 시다. 서명은 표암이고, 인장은 '늙은이 기(耆)', '우두머리 괴(魁)'를 새긴 '기괴(耆魁)'다. 기괴는 '기로과 수석'이라는 뜻으로 기로과는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실시한 특별 과거시험으로 60세 이상만 응시할 수 있는 노인 배려 정책이었다. 강세황은 64세 때 기로과에 응시해 1등으로 합격했다. 이 일을 기념하며 새겨서 사용한 인장이 '기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만년작임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은 젊을 때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했다. 아버지 강현이 대제학, 예조판서, 한성부판윤(서울시장)을 지냈고 할아버지 강백년도 이조참판, 예조판서 등 고위직을 지낸 명문가였다. 그럼에도 '벼슬이란 바랄 것이 못 된다'라고 생각하게 된 데는 그의 집안이 속해있던 당파이자 학파인 소북(小北)이 당시 정계에서 소외된 상황이었던 데다 맏형이 과거 부정 사건에 연루돼 귀양 간 일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원래는 서울에 살았으나 살림이 어려워지자 32세 때 처가가 있는 경기도 안산으로 이사해 벗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나이 오십을 넘기자 많이 살았다고 생각하고 입신양명하지 못한 자신의 생애를 '표옹자지(豹翁自誌)'로 정리해 놓았다.

일종의 자서전인 이 글에서 어려서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나이 열 서넛에 행서를 잘 써서 내 글씨를 얻어다가 병풍을 만든 사람도 있었다'라고 했고, '그림을 좋아해 때로 붓을 휘두르면 힘이 있고 고상해 속기를 벗어났다'라고 했다. 이런 자부와 자평이 과장이 아닐 만큼 강세황은 창작자로서, 높은 감식안을 지닌 비평가로서 조선 후기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단원 김홍도가 대화가로 성장하는데 후견인 역할을 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다 환갑이 된 해 강세황의 아버지 강현을 잊지 않았던 영조의 배려로 음서로 영릉참봉에 임명되며 강세황은 처음 관직을 갖게 된다. 이후 기구과에 합격했고, 66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60대 중반에 고위직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다. 69세 때는 호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정조 어진 제작의 감독을 맡았고, 71세 때 아버지가 역임했던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72세 때 건륭제의 천수연 축하사절단 부사로 북경을 다녀왔으며, 76세 때 금강산을 유람했다. 강세황은 79세까지 살았다. 환갑 이후의 눈부신 인생 역정이다.

'표옹자지'를 지을 54세 때만 해도 서울시장을 지내고 중국 황제의 생일잔치에 참석하는 대반전의 삶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