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이중정책이 씨뿌린 '화약고' 가자…더멀어진 '두 국가 해법'

입력 2025-02-06 17:00:15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이 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펜타곤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이 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펜타곤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수십 년간 충돌해온 가자지구에 대해 소유·개발 의지를 밝히면서 파문이 크다. 그간 국제사회가 견지해온 '두 국가 해법'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럼 가자지구가 '중동의 화약고'로 변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가자지구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동예루살렘과 함께 팔레스타인 영토의 일부로 고대부터 무역 및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였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가자지구는 오스만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았다.

이때 영국의 이중적인 정책이 분쟁의 씨를 키웠다. 1917년 영국은 전쟁 승리를 위해 팔레스타인 땅을 고리로 유대인들에게 독립국 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을 했다. 앞서 1915년엔 아랍인들에게도 '맥마흔 선언'을 통해 1차대전이 끝나면 팔레스타인 독립을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전쟁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고, 유엔은 1947년 분할 계획을 제시했다. 팔레스타인 땅의 56%는 유대 국가에, 44%는 아랍 국가에 할당하고 종교적으로 양측에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예루살렘은 별도의 국제 영토로 두자는 제안이었다. 아랍국가들의 강력 반발로 제안은 무산됐다. 유대인들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

이후 이집트 등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 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면서 팔레스타인인 75만명이 피란민 신세가 됐다.

이후 1956년, 1967년, 1973년에 각각 2차, 3차,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을 비롯해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이후 서안과 동예루살렘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했다.

1993년 미국의 중재로 성사된 이스라엘과 PLO가 맺은 '오슬로 협정'은 평화적 공존을 위한 좋은 기회였다. 이스라엘군이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철수했고,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가 시작됐다.

하지만 협정에 서명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2년 후 극우파에 암살당하고, 이듬해 하마스의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이행이 지체됐다. 이후 초강경 우파 성향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집권에 성공하면서 사실상 실패한 협상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