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굴 급경사 뿌리내려 독도는 우리 땅! 외치듯
백년 넘게 자리 지켜왔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 동해의 외로운 섬 독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무엇일까? 동도의 사철나무다. 소금기 강한 해풍과 극심한 가뭄을 견디고 바위틈의 척박한 터전에서 꿋꿋한 생명력으로 한 세기 넘게 버텨왔다. 독도의 두 개 큰 섬인 동도와 서도 중에서 동도의 천장굴 급경사 위쪽에 뿌리를 내린 시기는 1905년 전후로 추정된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편입시켰다던 그 무렵이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섰을 때 사철나무는 조용히 독도에 자리를 잡고 몸소 뿌리박기 시작해 몸피를 키우고 "독도는 우리 땅"임을 증거하며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울릉도 사철나무의 독도 정착에는 철새가 일등공신이다. 울릉도에서 열매를 먹고 훨훨 날아서 87㎞가 넘는 바닷길을 무사히 건너간 철새들이 독도에 잠시 머무르면서 씨를 배설한 덕분에 무임승차로 이주한 셈이다.
독도 사철나무는 거친 바람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바위에 붙어 납작 엎드려 있다. 100여 년 동안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외롭게 독도를 지켜온 보람이 있어 2012년 천연기념물 제538호로 지정 됐다가 2021년 11월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고 천연기념물로 재지정 됐다. 현재 동도 절벽의 바위를 뒤덮다 시피 할 정도로 생육 상태가 좋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불굴의 사철나무를 쉽게 실물로 영접할 수 없는 게 아쉽다.
◆소금기 강한 해풍에도 잘 견뎌
독도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라는 강인한 사철나무는 특별히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잘 큰다. 넓은 잎을 가진 상록수들은 대부분이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데 반해 사철나무는 추위에 어느 정도 적응해 한반도 중부 북쪽에서도 자생한다. 따라서 대구 경북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철나무는 사계절 내내 푸른 잎을 자랑하는 노박덩굴과의 상록수다. 키가 5m까지 자라며 잎은 줄기를 따라 작은 계란형으로 마주나고 있다.
사철나무가 사시사철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한 번 나온 잎을 평생 그대로 달고 있지 않는다. 이른 봄에 연초록의 새잎이 돋으면 묵은 잎은 서서히 떨어지기 때문에 늘 푸르게 보일 뿐이다. 둥그스름한 이파리를 만져보면 표면이 동백나무 잎처럼 매끈하다. 두께도 두꺼워 구부려보면 접히기보다 부러지는 느낌이 든다. 잎의 가장자리는 부드러운 물결 모양이다.
4, 5월에 잎겨드랑이에서 꽃대가 길게 나오면서 작고 연한 황록색의 꽃이 얼핏 봐서 자오록하게 핀다.
가을에 작은 구슬 모양의 옅은 황갈색 열매가 익어 껍질이 서서히 갈라진다. 11월 추위가 시작되면 사철나무의 새빨간 씨앗 3, 4개가 푸른 잎 사이로 빠끔히 앙증맞게 모습을 드러낸다.
◆동청이라는 옛 이름
사철나무란 이름이 너무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 '사계절 내내 푸른 나무'란 뜻인데, 이런 상록수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옛 한자 이름 동청수(冬靑樹)도 마찬가지다. 사철나무, 감탕나무 등 상록수를 뭉뚱그려 동청수 혹은 동청목이라고 불렀다. 옛 책에 나오는 나무 이름이 동청수라면 상황에 따라 잘 분별해야 한다.
임진왜란 때 예조판서로서 선조를 호종했고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여 국난 극복에 힘쓴 윤근수(尹根壽·1537~1616)의 「궁정 뜰에서 세 수를 읊어 습재(習齋)에게 써서 화답을 구하다[掖庭三詠錄呈習齋求和·액정삼영록정습재구화]」라는 한시 세 수(首) 가운데 「동청수(冬靑樹)」를 감상해보자.
뜰 앞에 곧은 줄기가 기이한 모양으로 솟았는데 庭前直幹聳奇姿(정전직간용기자)
촘촘하고 푸르게 무성한 잎은 낮게 드리웠네 密葉低空翠葆垂(밀엽저공취보수)
짙푸른 모습이 여러 풀과 같다고 말하지 말게 莫道葱蘢同衆卉(막도총롱동중훼)
눈 속에도 홀로 푸르디푸름을 알게 될 테니 靑靑獨向雪中知(청청독향설중지)
<『월정집』 권2>
여기서 제목의 '동청수'는 사철나무로 여겨진다. 추위에 약한 감탕나무는 서울에서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헌의 杜沖(두충) 나무의 정체
사철나무의 또 다른 한자 이름은 杜沖(두충)이다. 조선 후기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1595~1682)의 「십청원기(十靑園記)」에는 "꽃은 시절에 따라 피고 시들어 그것이 변하는 게 내심 한탄스럽고 즐겁지 않아 전나무, 측백나무, 박달나무, 비자, 노송, 만송(蔓松), 황죽(篁竹), 두충(杜冲) 같은 늘 푸른 나무를 많이 심었다"며 상록수를 열거했는데 두충도 들어있다.
『세종실록』의 「지리지」에 경상도 동래현(부산)의 해운대(海雲臺)에 대한 설명에는 "현 동쪽 바닷가에 있으니,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다. 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동백나무와 두충(杜沖)나무가 그 곁에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고 나온다.
영조 24년(1748)에 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종사관 조명채(曹命采)가 쓴 견문록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는 "화초 나무는 소철, 동백, 감귤, 종려, 두충(杜沖), 송황(松篁) 따위를 섞어 심어서 사철 푸르다"라고 일행이 머물렀던 관소(館所) 주변의 두충을 포함한 상록수를 나열했다.
우리가 흔히 한약재로 알고 있는 두충나무(Eucommia ulmoides Oliv.)와 이름이 같아서 헷갈린다. 한약재로 쓰이는 두충나무는 낙엽활엽수로 원산지는 중국이며 원래 『본초』의 이름은 '두중(杜仲)'이다. 중국에서 약효가 좋고 수요가 많은 두충나무의 국외 반출을 엄격히 막고 약재만 제한적으로 팔았다.
1926년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현재 홍릉 숲)에 두 그루를 도입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 약재로 쓰이는 두충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 홍릉의 두충나무 두 그루로 국내에 식재된 모든 두충나무를 번식시켰고 한다. 국내에서 본격적인 일반 재배는 1980년대부터다.
그러면 「십청원기」에 나오는 두충은 과연 사철나무가 맞을까? 다산 정약용이 1819년에 저술한 『아언각비(雅言覺非)』에 실마리가 있다. 다산은 당시 우리말의 잘못된 쓰임을 지적하면서 두중(杜仲)을 두충(杜沖)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두체자(杜棣子)를 중국의 두중(杜仲)으로 잘못 알고 있어 이게 와전되어 두충(杜沖)이라고도 부르며, 방언으로 두을죽(杜乙粥)이라고 한다"고 했다.
두을죽은 고산지대에서 나는 진달랫과의 들쭉나무 열매를 이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노박덩굴과의 사철나무(Euonymus japonica Thunb.)로 보인다. 일부 지역에서는 사철나무를 '들축낭그' 혹은 '들쭉나무'라고 말한다. 실제로 1949년 박만규가 지은 『우리나라 식물명감』에는 사철나무를 들쭉나무로 불린다고 기록돼 있다.
국립수목원의 국가표준식물목록에도 사철나무의 다른 이름[이명]으로 들쭉나무가 등재돼 있다. 이런 이유로 다산이 『아언각비』에서 지적한 본래 '두충과 그 방언 들쭉'은 사철나무로 볼 수밖에 없다.
사철나무를 화두충(和杜沖)으로 부르는 한약방도 있다. 옛날 일본에서 사철나무 껍질을 중국산 약재 두중(杜仲)의 대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접두사 화(和)는 일본을 뜻한다.
◆조선시대 양반집 안채 가리는 울타리
옛날부터 사철나무의 잘 나가는 쓰임새는 생나무 울타리다. 촘촘하게 뻗은 가지와 사철 잎을 달고 있어서 가리개 역할에 안성맞춤이었다. 웃자란 가지를 잘라도 금방 새가지를 내민다. 햇빛이 잘 들지 못해도 큰 욕심을 없이 주어진 만큼 광합성을 한다. 지금도 동해안 갯마을에는 사철나무 생울타리가 종종 보인다.
조선 정조 때 문신이자 문장가인 황경원(黃景源, 1709~1787)의 「시골집 8수[田廬八首·전려8수]」 가운데 첫 번 째 수를 감상해보자.
시골집이 먼 교외에 있진 않지만 田廬非遠郊(전려비원교)
그래도 숲속 골짜기 정취가 있네 猶有林壑趣(유유림학취)
맑은 시내는 육칠 리나 뻗어 있고 淸谿六七里(청계육칠리)
구름은 산길에 잔뜩 끼어 있으며 雲滿山中路(운만산중로)
높다란 재실은 층층 봉우리로 둘려 있고 高齋遶層嶂(고재요층장)
아래로는 사철나무들이 굽어보이네 下臨冬靑樹(하림동청수) (이하생략)
<『강한집』 권1>
시골집 주변의 풍광이 조감도처럼 그려지는 시다. 사철나무가 울타리로 심어진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조선 후기 양반집의 마님 거처인 안채 바로 앞뜰이나 사대부들이 가무를 즐겼던 별서(別墅) 정원 주변에는 아무나 들여다볼 수 없도록 사철나무를 심었다. 은폐·엄폐 용도의 이른바 취병(翠屛)이라는 울타리다. '비췻빛 병풍'이라는 뜻으로 살아 있는 나무를 심어 조성했다. 사철나무는 늘 푸르기 때문에 겨울에도 안채를 가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지치기로 나무 모양을 마음대로 다듬을 수 있어 이런 취병에 적합하다.
권세가의 후원에서 벌어지는 잔치를 그린 김홍도의 풍속도(風俗圖) <후원유연(後苑遊宴)>을 보면 연회가 벌어지는 정원 둘레에 취병을 조성해 사생활을 외부에서 볼 수 없도록 가리고 있다. 대나무로 거푸집을 엮고 그 안에다 사철나무의 일종인 줄사철나무를 올린 듯하다.
◆대구경북 사철나무
사철나무는 추위에 강해 경북에서 잘 자란다. 특히 울릉도 해안가 곳곳에 자생하는 사철나무가 눈에 띈다. 동백나무, 후박나무와 어울려 겨울에도 푸른 수풀을 이루고 있다.
대구 도심의 야산에도 사철나무가 군데군데 자생한다. 대구 수성구 범어공원에는 상수리나무나 굴참나무와 같은 큰 나무 그늘 아래에서도 홀로 자라는 어린나무를 보게 된다. 독도의 사철나무처럼 어디에서 열매를 먹은 새들의 배설 덕에 옮겨 심지 않고 씨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성장한다.
공원이나 고택의 사철나무는 정원수로 잘 다듬어진 단정한 모습이다. 대구 동구 평광동 단양우씨 문중의 재실인 첨백당의 사철나무는 키가 2m 넘고 밑동 둘레가 98cm, 심은 지 80년이 넘는다고 한다. 첨백당을 관리하는 단양 우씨 후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식재됐다고 전했다.
엣 문인들은 사철나무를 만년지라고 하여 시에 종종 소환했다.
금궐에 봄빛이 이르니 金闕韶光早(금권소광조)
동호(銅壺)에 효루가 더디구나 銅壺曉漏遲(동호효루지)
오색 구름이 서기를 머금어 五雲含瑞氣(오운함서기)
먼저 사철나무를 둘렀네 先繞萬年枝(선요만년지)
<『동문선』 제19권>
고려 후기 문신인 조준(趙準)이 지은 「어전춘첩자(御殿春帖子)」다. 봄을 맞아 임금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군주시대 일종의 용비어천가다. 만년지는 장수를 기원하는 시어(詩語)로 사철나무를 가리킨다. 중국 송나라 휘종(徽宗) 때 낸 과거시험 제목 '만년지 위에 태평작[萬年枝上太平雀]'에서 유래된 말이다. 만년지의 뜻을 몰라 합격자가 한 명도 없자 어떤 사람이 몰래 내시(內侍)에게 물어 보니 "만년지는 동청수(冬靑樹), 사철나무다"는 답이었다.
오늘 절기는 입춘(立春), 독자 여러분은 어떤 입춘방을 붙였나요?
『대구 나무로 읽는 역사와 생태 인문학』 저자·언론인 chunghama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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