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81>겸재 선생,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을 그리다

입력 2025-01-15 17:07:28

미술사 연구자

정선(1676-1759),
정선(1676-1759),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종이에 수묵, 79.2×138.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은 예로부터 산신령이 산다고 믿었던 정신적 의지처이자, 땔감과 임산물을 제공하는 경제적 배경이었으며, 적으로부터 숨을 수 있는 보호막이었다. '인왕제색도'는 지금도 굳건히 서울을 내려다보는 인왕산의 웅혼한 모습이 진경산수의 대가 정선의 붓을 통해 회화 예술로 탄생한 작품이다. 풍수지리설은 경복궁 뒤 북악산이 서울의 주산(主山)이고 타락산이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인왕제색도'는 가로 138.2㎝, 세로 79.2㎝인 거작으로 일찍이 국보 제216호로 지정됐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 소장하다 아들과 손자를 거쳐 2021년 나라에 기증됐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불리는 2천200여점 중 한 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를 위해 붙인 소장품 번호가 '건희 1'이다. 한 점 한 점이 모두 명품인 중에서도 첫째로 꼽혔을 만큼 특별한 작품이다.

맑은 날에는 옅은 회색으로 밝게 보이는 인왕산 바위봉우리가 비에 젖어 검은빛을 띄고 골짜기에서 물안개가 길게 띠를 이루며 피어오르는 인상적인 순간이다. 바위산의 강인한 정기를 드러내는 압도적인 먹색과 산 중턱을 흐르는 흰 안개가 장엄한 이중주를 이루는 가운데 숲을 이룬 나무들에도 물기가 어렸다. 화면 오른쪽에 '인왕제색(仁王霽色) 겸재(謙齋) 신미(辛未) 윤월(閏月) 하완(下浣)'으로 써놓았고 인장은 '정선(鄭敾)', '원백(元伯)'이다. '인왕산의 비가 개인 모습'이라고 했고, 날짜까지 있어 정선이 일흔 여섯의 고령인 1751년(영조27) 윤오월 하순에 그렸음을 알려준다.

바위 봉우리의 중량감을 짙은 먹을 반복해서 내리그은 직설적인 필치로 드러내 바로 코앞에서 마주 대하는 듯하다. 이런 힘찬 붓질의 시커먼 바위가 여기저기 솟았다. 봉우리 좌우와 산 중턱은 솟은 부분을 희게 남기고 옅은 먹과 부드러운 선을 중첩시켜 능선을 묘사한 후 동글동글한 점을 산발적으로 찍어 세부 또한 흑백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비에 흠뻑 젖었다 말끔하게 개인 산뜻한 인왕산을 박진감 넘치는 필묵법과 대담한 구도로 표현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치마바위가 잘린 상태인 것은 원래의 구도가 아니라 위쪽에 있던 글씨를 잘라냈기 때문인데, 정선의 60년 지기(知己) 이병연이 하루빨리 병석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뜻을 이 그림에 담았다고 한다.

겸재 선생이 늘 보던 인왕산이고 그의 개성적인 화풍이 잘 드러난 서울의 실경이어서 더욱 감동적이다. 강렬한 필묵법과 대담한 구도도 그렇지만 이 작품이 현대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가로가 세로보다 길면서 세로도 넓은 직사각형 화폭인 이유도 있다. 지금은 많이 볼 수 있지만 정선 당시에는 이런 화면 비례가 흔치 않았다는 새로움이 있다. '인왕제색도'는 '금강전도'와 함께 18세기 진경산수의 걸작으로 꼽히는 정선의 대표작이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