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현장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의 과실이 적다고 판단하던 때는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다. ▷목덜미 잡고 하차 ▷눈이 어디 있냐며 삿대질 ▷기세 확보의 마침점인 증인 수소문까지의 삼단계 전개가 공식이던 야생의 시절이다.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이 주요 길목이나 교차로에 제법 걸렸다. 여성 운전자에게는 특히나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기록장치, 블랙박스는 세탁기만큼이나 여권(女權) 신장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주장해 볼 만하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인다. 정치권에서도 과학과 기술을 동반한 민심 파악 방식이 있는데 바로 여론조사다. 여론조사가 없던 시절에는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저런 이들이 '토박이 전문가'를 자처하며 돕겠다고 선거 캠프에 줄을 섰다. 그런 이들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루면 기세에서 앞섰다는 평가가 입소문을 타고 번지는 식이었다. 그러니 유권자의 의사를 수치화한 여론조사 추이는 유용했다. 전략 기획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과학적 영역에 있는 듯한 여론조사지만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이 가능한 건 함정이다.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들고 청사진을 보여 주는 이가 나타나면 함정일 수 있다는 의심을 품어야 하건만 천군만마로 인식하는 게 출마자들의 심리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는 말이 정설에 가까운 정치권에서 구체적인 도움을 제시하는 이라면 누구든 혈맹에 가까운 동지가 된다. 인사이트를 가진 책략가로 모시기까지 한다. 현인(賢人)이라면 그런 접근을 경계하겠지만 엎치락뒤치락하는 하루하루의 지지율을 보는 출마자의 감각은 마비되기 십상이다. 선거 전략과 전개를 일임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보름 동안 선거운동을 열심히 해서 당선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란 말이냐"고 따져 묻는다면 그 말도 영 틀리지 않다. 드물 뿐이다. 박빙(薄氷)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지역은 선거운동의 열성과 진심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봐야 한다. 최근 치러진 22대 총선에서는 여론조사에서 줄곧 밀렸던 경기 화성을 지역구의 이준석 의원이 그랬다. 다만 도저하게 흐르는 민심의 흐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세는 거스르기 힘들다. 소속 정당의 무능과 실책이 거듭되면 제아무리 유능한 출마자라 해도 개인기로는 한계에 부딪힌다.
여론조사 업체를 두고 여러 정치인 및 출마자들과 교류해 온 것으로 알려진 명태균 씨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알아챈 게 있다. 여론조사를 도구로 출마자들에게 접근하는 건 흔하며 선거를 치르기까지 정치인들이 '선거판의 자칭 고수들'에게 쉽게 휘둘린다는 사실이다. 이들 앞에서 5선 의원인 김영선 씨도 핀잔을 들으며 주춤거렸다. 선거 공훈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수위가 '갑을관계'로 비칠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명태균 씨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반박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설득력 있게 통용되는 말도 아니다. 그런 식의 추천을 우리는 일반적인 공천(公薦) 시스템이라 여기질 않기 때문이다. 5선 의원도 그렇게 움츠러드는데 정치 초보들은 어떨까. 하늘이 점지한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출마자를 돕는 일은 없다. 선거판을 움직일 수 있다는 이들 상당수는 책략가가 아니기도 하고 반대급부를 반드시 요구한다. 여전히 후진적인 대한민국 정치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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