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 푸른숲 펴냄
국공합작에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는 격동의 중국현대사를 배경으로 몰락한 부르주아의 인생 역정을 그린 '인생'은 책과 영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전 세계적으로 1억 부가 팔린 원작을 바탕으로 장예모와 공리 갈우가 만든 영화 '인생'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다. 그로부터 3년. 위화는 같은 시기에 피를 팔아 가족을 건사하며 고단한 삶을 버텨온 남자 허삼관을 등장시킨다.
의사인 부친과 병원 딸린 집과 늘 가까이에 있던 죽음. 문화대혁명 시기와 맞물린 위화의 유년시절은 그의 소설의 토양이 되었을 터다. 1949년생 하루키의 문학이 '전공투'와 긴밀한 것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만 해도 한국사회에는 매혈이 성행했다. 어머니는 일하는 것보다 피를 파는 게 벌이가 나아서 돈이 궁한 이들이 피를 판다고 했다. 매혈이 법으로 금지되고 헌혈이라는 이름으로 혈액관리가 바뀐 80년대까지 신문을 통해 흔히 접하던 일이었다. 허삼관 역시 반 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도 벌기 힘든 삼십 오원에 첫 번째 매혈을 시작한다.
책에서 허삼관은 10차례 피를 뽑는다. 시작은 꽈배기 서시 허옥란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다. 그 돈으로 샤오룽빠오와 훈툰과 매실과 사탕과 수박 반통까지 선사하며 허옥란의 환심을 사더니 결혼에 성공한다. 두 번째는 방씨 아들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세 번째는 임분방에게 선물을 보내려고, 네 번째는 대기근으로 기력 없는 가족에게 국수를 먹이기 위해서이며, 다섯 번째는 생산대에 가는 일락이를 위해, 여섯 번째는 이락이의 생산대장 접대를 하려고. 그리고 일곱 번째부터는 간염에 걸린 일락이 치료비를 만들려고 피를 판다. 특히 이 시기는 3~5일에 한 번씩 상하이까지 가는 과정에서 피를 팔게 되는데 쑹린에선 쇼크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혈받기까지 하며 사투를 벌인다. 허삼관이 피를 파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윤리적 판단에 근거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허삼관 매혈기'가 한 사람의 도덕적 성장을 그렸다고 봐도 무방한 까닭이다.
피를 팔아 가족을 지탱해온 남자가 삶의 고비 때마다 내린 윤리적 선택은 곧 매혈의 역사와 같이 한다. 허삼관의 분투에는 대약진운동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폐해지진 삶과 중국의 사회주의 정치투쟁사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한편 매혈로 자본시장에 참여하며 점차 매몰되어가는 허삼관의 삶은 자본주의에 대한 우회적 비판(마르크스가 말한 '죽은 노동의 산 노동에 대한 지배')으로도 읽힌다.
거칠게 말해서 허삼관은 피를 팔 수 있을 때 존재증명이 가능했다. 책의 마지막, 가구장이에게나 가보라는 젊은 혈두 말에 슬피 울며 거리를 헤매는 건 유효기간이 다한 남자의 기구한 말년을 보여준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이전까지 피를 뽑고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냥을 먹었다면 이 음식을 먹기 위해) 매혈을 원했으나 실패한 남자의 이야기.
전작 '인생'의 마지막 문장이 자조와 회한으로 가득 찬 인생의 체념을 보여준다면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허삼관 매혈기'의 마지막 문장은 굴절된 역사와 제도에서 살아남은 자의 호기, 피를 팔며 가족과 가정을 지킨 남자의 자부심이 허공을 배회한다. 그렇다고 차마 마지막 문장을 지면에 옮길 순 없는 노릇, 책에서 확인할 일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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