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우리 역사 되찾기] 잃어버린 땅 간도를 찾아서(2) 북경조약과 간도협약

입력 2024-10-07 13:37:49 수정 2024-10-07 14:31:51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연변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의 북한, 중국, 러시아 2국 교차지점에서 바라본 북한 경원 지역.경원에서 북쪽 700리까지가 고려, 조선강역이었다.
연변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의 북한, 중국, 러시아 2국 교차지점에서 바라본 북한 경원 지역.경원에서 북쪽 700리까지가 고려, 조선강역이었다.

고조선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압록강~두만강 북쪽의 간도는 우리 영토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간도는 러시아와 청으로 넘어갔다. 첫 번째는 1860년 11월 14일 청과 러시아가 맺은 '중아(中俄:청과 러시아) 북경조약'이었다.

◆연해주 차지한 러시아

19세기 후반 서구열강이라 불렸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 침략에 나서자 아직 자본주의 체제로 발전하지 못했던 러시아도 끼어들었다. 러시아인들이 흑룡강이라고 불리던 아무르강(Amur River)에 나타난 것은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러시아인들이 남하하자 청군이 이들을 단속했고 1689년 두 나라는 네르친스크조약(Treaty of Nerchinsk)을 맺어 국경선을 확정했다.

약 90여년 후인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면서 그 불똥이 간도까지 튀었다. 1856년 10월 중국인 소유지만 실제는 영국 해적선이었던 애로우호를 청국 관원이 검문하면서 영국 국기를 내리자 영국은 크게 반발했다. 영국이 군사적 침략에 나서자 프랑스도 선교사 샤프들레이느(Chapdelaine)가 광서성(廣西省)에서 살해 당한 사건을 빌미로 영국과 연합군을 결성해 청을 공격했다. 청은 1858년의 천진(天津)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다시 무릎을 꿇었는데, 이때 러시아가 수세에 몰린 청을 압박해 같은 해 아이훈(璦琿)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흑룡강 이북의 60만㎢를 차지하고, 흑룡강과 오소리강 동쪽 연해주 지역 40만 ㎢는 청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흑룡강과 오소리강 동쪽 연해주 지역은 〈백두산정계비〉에 따라도 조선 국경이었으므로 타국의 땅을 러시아와 청이 마음대로 공동관리지역으로 빼앗아 간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청이 천진조약 이행에 소극적이자 영·프연합군은 1860년 재차 군사를 일으켜 북경을 함락시키고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웠다. 함풍제(咸豐帝)가 북경 북쪽의 하북성 열하(熱河:현 승덕)로 피신한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는 공친왕 혁흔(奕訢)과 북경조약을 맺었다. 러시아는 다시 이 기회를 이용해 청을 압박해 1860년 11월 14일 '중아(中俄:청과 러시아) 북경조약'을 체결했는데, 흑룡강성 동쪽의 청·러 공동관리구역을 넘겨받았다. 흑룡강성 동쪽의 연해주는 불법적으로 청·러의 공동관리구역이 되었다가 다시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갔다. 조선은 두 눈 뜨고 흑룡강성 동쪽의 선조들의 땅을 빼앗긴 것이었다.

◆무능한 조선정부와 대조적인 백성들

북경조약이 체결되던 1860년 조선은 철종 11년으로서 노론 소수 가문이 권력을 사유화하는 세도정치 시기였다. 세도가들은 조상 전래의 거대한 땅이 타국에 넘어가는 것도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조약 체결 다음 달 홍경래가 주도하는 평안도 농민봉기가 일어나 북방이 전쟁터가 되었으므로 조정은 압록강~두만강 이북 강역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조선 지배층이 사실상 방기한 압록강~두만강 이북 땅을 주목한 사람들은 조선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산삼을 채취하거나 짐승을 사냥하고 정착해서 농사도 지었다. 압록강~두만강 이북땅에 사는 백성들이 점차 늘어나자 청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조선 통역관들의 기록인 《통문관지(通文館志)》 '고종 4년(1867)' 조에는 지금의 심양인 봉천에 있던 청나라 성경장군(盛京將軍) 아문(衙門:관청)에서 "조선 민간인 하명경(何名慶) 등이 사사로이 월경해서 봉천부(奉千府) 왕청문(旺淸門) 밖 육도하(六道河) 등지를 개간했다"고 항의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통문관지》 '고종 6년(1869)' 조는 "청나라 예부에서 봉황문 남쪽부터 왕청문 북쪽까지 찾아낸 조선인들의 개간지가 9만6천여 하루갈이(日耕)"라고 전한다. 하루갈이란 성인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뜻하니 무려 9만6천여 명의 장정을 동원해야 하루에 농사지을 수 있는 농지를 개간했다는 뜻이다.

사라지기 전의 백두산 정계비와 지키는 사람들
사라지기 전의 백두산 정계비와 지키는 사람들

◆청국과 조선 백성들의 충돌

고종 6년(1869)과 이듬해 한반도 북부에 대흉년이 들자 백성들은 더욱 많이 도강해 정착했다. 청이 이들을 압록~두만강 남쪽으로 내쫓으려고 하면서 조선 백성들과 충동했다. 고종 20년(1883) 청의 길림·훈춘 초간국(招懇局)의 진영(秦煐)과 돈화(敦化)현 지현(知縣) 조돈성(趙敦誠)이 함경도 경원부와 회령·종성부에 공문을 보내 "올해 추수를 마친 후 9월 안으로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백성을 데려감)하라"고 요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백성들은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찾아 조사한 후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정계비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설명했다. 때마침 경원부에 와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종성 사람 김우식에게 조사시킨 후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고 확인하고, 청나라에 백두산정계비와 강의 발원지를 조사해 국경을 분별하자고 요청했지만 청이 거부했다.

◆조선 강역으로 편입시키다

고종 40년(1903)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은 고종황제에게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 관리에 임명하자고 요청하면서 "북간도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로…… 수십 년 전부터 함경북도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이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 수 만 호에 10만여 명이나 되는데, 청나라 사람들에게 혹독한 침탈을 받고 있다(《고종실록》 40년 8월 11일)"고 보고했다. 김규홍은 "백두산정계비 이후 토문강 이남 구역은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다"고 설명했다. 고종은 간도시찰관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파견해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간도에 상주하게 했다. 서간도 백성들은 평안도에, 북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드디어 대한제국은 간도를 명실상부하게 자국령으로 관리한 것이다.

◆불법적인 간도협약

그러나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불법강탈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당초에는 일제도 1907년 8월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용정촌(龍井村)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두어 육군중좌 사이토 스에지로(齋藤季治郞)에게 관리하게 했다. 두만강 북쪽의 혼춘(琿春)을 비롯한 여러 곳에 영사관 분국과 경찰서를 설치해서 여전히 대한제국의 강역으로 관리했다.

청은 간도를 넘겨받을 수 있다면 어떤 양보도 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 결과 만주철도 부설과 무순(撫順) 탄광을 매개체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곧 '간도협약' 체결 이틀 전인 1909년 9월 2일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은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통감에게 〈청・일 간 간도 문제 해결에 따른 간도파출소 철퇴 대비 건〉이란 문서를 보냈다. "간도 문제에 관해서는 청국의 영토권을 승인하는 것 외에 또 잡거 한국인에 대한 재판권을 청국에 주고…간도 주재 파출소는 머지않아서 철퇴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09년 9월 4일 청과 일제는 북경에서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간도협약' 제1조는 "도문강(圖們江)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의 발원지역은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되 석을수(石乙水)를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석을수는 두만강의 일부였으므로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청의 주장이 관철된 것이었다. 또한 압록강~두만강 이북에 사는 조선백성들의 재판권도 청으로 넘어갔다. 1909년 10월 27일 일제는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철수시켰다. 청은 일제에 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탄광 개발권을 넘겼다. 즉 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탄광 개발권이란 값을 치르고 간도를 넘겨받은 것이었다.

북한, 중국, 러시아 국경이 만나는 지점임을 설명한 표지판
북한, 중국, 러시아 국경이 만나는 지점임을 설명한 표지판

◆간도로 가는 백성들

일제는 간도를 청국에 넘겼지만 조선백성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의 우시마루(牛丸潤亮) 등이 작성한 《최근 간도사정(最近間島事情:1927)》은 한국인들이 망국 후 간도로 대거 이주했다면서 그 이유로 "한일합방에 불평을 가진 자와 일본 관헌의 간섭을 피함과 아울러 만주의 지가가 저렴한 점"을 들었다. 망국 후 일제의 학정으로 생계 수단을 잃은 빈농들은 생계를 위해, 선각자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국경지방시찰복명서〉는 만주에 사는 한국 국민들은 각 지역 자치제를 실시했는데 그 명칭을 사(社) 또는 향(鄕)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사'라는 명칭은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 경북 안동의 석주 이상룡 일가 및 백하 김대락 일가, 강화도의 이건승 등의 양명학자들이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뒤의 대고산에서 노천군중대회를 열고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 것이 전 만주로 퍼진 것이다. 청국이 러시아에 불법적으로 팔아먹은 연해주에서도 1911년 독립운동세력들이 민단자치조직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러시아 총독과 교섭해서 흑룡강과 송화강 합류지점에 광복군 군영지를 확보했다. 흑룡강 동쪽 연해주는 청국이 러시아에, 두만강 북쪽 간도는 일본이 청국에 팔아넘겼지만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이다.

◆교과서 고치자

고려·조선의 서북방 강역은 지금의 요녕성 심양 남쪽의 봉집보까지이고, 서북방 강역은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 선춘령까지였다. 2025년부터 사용할 한국사교과서는 고려 북방강역을 압록강 서쪽에서 동남쪽 함경남도까지라고 축소왜곡하고 있고, 조선 북방강역을 압록강~두만강까지라고 축소 왜곡하고 있다. 이것이 맞다는 간도는 우리 강역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성호 이익이 〈천지문(天地門)〉 '두만쟁계(豆滿爭界)'에서 "고려 윤관의 비가 있는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압록강~두만강 북쪽은 우리 강역이다.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이 반도사관에 따라 고려 북방강역을 크게 축소왜곡했는데,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 이병도는 이케우치 히로시를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였고, 그 연구방법이 실증적"이라고 극찬했다. 이런 이병도를 태두도 떠받드는 역사학자들이 편찬한 한국사교과서를 실제 사료를 토대로 고치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