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듯 채워진 두메산골 고향, 달성 조길방 가옥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두메산골에 터 잡은 가옥
산이 깊다. 그 산 언저리에 집이 있다. 산이 집을 허락했고 집이 산을 받들었다. 사통팔달한 거리에만 집이 있는 게 아니다. 인적이 미치지 못할 만큼 험난한 두메산골 오지에서도 집을 만나게 된다. 사람의 손길이 경이로워지는 순간이다.
최정산이 쑥 솟은 채 어깨를 겯고 있다. 사방이 준령이고 골짜기다. 집이 향해 앉은 정면 서쪽 산봉우리가 한눈에 든다. 우람하고 장대한 비슬산 봉우리가 그리 높지 않게 보이는 건 이 집이 그만큼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는 거다. 오지도 이런 오지가 없다. 멀지 않은 곳에 번화한 대구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도깨비가 살 것 같다고 하면 과언일까? 누가 왜 이 골 깊은 곳에 기둥을 세우고 이엉을 얹었을까.
주인 없는 집을 드나든 것도 몇 해째인가.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던 한겨울에도, 산벚꽃 흐드러지고 뻐꾸기 울던 봄날에도, 마을 초입의 느티나무가 무성해져 그늘을 깊게 내리던 한여름에도, 이른 아침이거나 해저물녘을 가리지 않고 서성이다 가곤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집을 '달성조길방가옥(국가민속문화재 제200호)'이라 부른다. 집이 터를 잡은 곳은 해발 450m의 가파른 최정산 기슭이다. 겨우 5~6채의 집이 있는 마을 뒤편에 큰 바위가 있다 하여 한덤(대암, 大岩) 마을로 불린다. 마을이기 전에 산이고 숲이고 골이었다. 집을 짓기에는 마땅치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의지와 바람은 자연도 물러서게 할 만큼 강했던 것일까. 나무를 베고 터를 다지고, 풀을 물리기를 반복하여 끝내는 집을 세웠다.
조길방 가옥의 입향조는 함안 조씨(咸安 趙氏) 조광국(趙光國, 1708~1776)으로 가옥의 이름이 된 '조길방'의 9대조 어른이다. 조광국의 본가는 확정하기는 어려우나 현재 대구국제공항이 있는 동촌 부근이었다고 한다. 집안에 화(禍)가 일자 혼자 깊은 골짜기까지 와야 했던 입향의 사연은 세세히 알 수 없으나 무척 다급했던 것 같다. 옛날에는 하루 이틀 발품을 팔아야 할 먼 거리였다. 나고 자란 고향을 가꾸고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귀히 여기던 시절,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땅에 터를 다지는 건 일생일대의 도전이자 엄청난 용기였다.
◆조길방 가옥 후손에게 듣는 초가 생활
조길방 가옥은 1984년 12월 24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초가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고, 서민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안채 종도리 장여에 "성상 재위 구년 갑진 이월 십구 일 묘시 견주 미시 상량(聖上在位九年甲辰二月十九日卯時堅柱未時上樑)"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조선 정조 8년(1784년) 경에 지어졌다는 의미다.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중순, 저물녘의 한덤 마을은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가옥 입구가 오늘따라 말쑥하다. 나흘 전 다녀갔던 터라 마당 가득 풀이 무성했던 걸 기억한다. 조심스레 안채 마당으로 들어서니 중년의 내외가 일을 하고 있다. 가옥의 잡무를 돌보는 내외는 나그네가 마루와 처마, 집 구석구석을 살펴도 이상히 여기지 않는다.
한참 후 일손이 조용해진 남성에게 인사를 건네니 그제야 어떻게 오셨느냐 묻는다. 내외가 조길방 가옥의 후손인 걸 안건 그때였다. 언젠가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은 후손을 마주하니 얼마나 반가운가. 조길방의 자녀 7남매 중 셋째 아들 내외이자 입향조 조광국의 10대손 조권재·이재선 내외다. 조상들의 묘에 풀을 내리고자 고향에 온 것이다.
"'광' 자 '국' 자 할아버지가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오시게 된 겁니다. 당쟁의 난리가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인 거 같아요. 여기가 아주 골짜기잖아요. 옛날에는 숲이 우거져서 하늘이 안 보였다고 해요. 할아버지가 여기 들어오셔서 지금까지 저의 아들 대까지 11대가 내려온 거예요."
맞다. 당쟁의 난리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집이 터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견딘 세월의 무게다. 조광국이 이 험준한 최정산 언저리에 뿌리내린 것은 기적과 같았다. 인간의 곧고 굳은 의지 앞에서는 자연도 그 뜻을 헤아리고 자리를 내어 준다고 가옥은 말하는 듯하다.
안채는 산세를 따라 앉힌 탓에 서향이다. 주변의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안채를 앉혀 마당보다 높다. 초가 임에도 대청을 둔 것이 인상적이다. 대청 벽을 가득 채운 건 임금의 교지다. 비록 두메산골 초가지만 명문가임을 짐작게 한다. 대청 왼편에는 큰방과 부엌, 오른편에는 건넌방이 있다. 안채 왼편에는 사랑채, 오른편엔 아래채가 있고 사랑채 뒤엔 별채가 있다.
"안채는 할머니, 어머니, 딸들이 썼어요. 여성들의 공간이지요. 대청 아래 왼편 사랑채는 남자들의 공간이에요.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아들들이 썼어요. 손님들이 오시면 모시는 공간이기도 했지요."
◆비워진 듯 채워진 집, '고향'
"대구서 학교를 다녔어요. 한 번씩 집에 올 때면 가창댐 인근에서 버스에서 내려 여기까지 한 시간 이상 걸어 올라왔어요. 밤에 숲에서 부스럭거리면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우리 할아버지가 어쩌다가 이 꼴짝에다가… 이래 손자를 이렇게 힘들게 하노. 그랬는데 내가 나이 들어보니까 할아버지가 선견지명이 있으셨구나 해요. 사실 고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나는 여기서 태어나고 지금도 이 집이 있고 아이들한테도 고향이라는 걸 대대로 물려줄 수 있다는 게 엄청난 거지요."
10대손 조권재 씨에게는 비워 두고도 한시도 잊지 못하는 집이다.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커다란 집 한 채가 마음에 들어 있었던 게다. 몸은 떠나 있어도 늘 무의식 속에 '고향'이 있기에 마음만은 부유했다.
이제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없다. 빈집이다. 그러나 빈집이 아니다. 누구는 여기서 태어나고 누구는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그간 집을 팔라는 곳도 있었다. 단순히 집을 파는 것이 전부가 아닌, 고향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알기에 후손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먼 산을 바라보며 가옥을 이야기하는 조권재 씨의 표정이 제법 평온하다.
곧 추석이다. 고향을 찾아 선조의 무덤에 풀을 내리며 내 근원의 뿌리를 거슬러가 보는 것도 참 의미가 깊으리라. 아무도 살지 않으면 어떤가. 태어난 집이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숭고하지 않은가. 삶의 길목에서 허한 기분 한 줄 파고들 때면 으레 아무도 없는 집에 찾아와 가만히 앉았다가 가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지 않던가. 조광국은 후손들에게 엄청난 재산보다 고향을 유산으로 남겼다. 두메산골의 무성했던 자연이 물러나며 터를 허락했던 곳에 한 집안이 뿌리내리고 일어선 게다.
양반가의 상징인 기와가 얹히고 문명의 변화에 초가집을 헐고 콘크리트 벽에 얄따란 함석지붕이 얹힐 때, 함안 조씨 집안은 흙벽을 지키며 볏짚이엉을 걷어내지 않았다. 기와를 얹어 굳이 양반가임을 보이면 무엇하리, 함석지붕을 얹어 현대화하면 무엇하리. 흙벽과 볏짚이엉을 굳이 고수한 건 터를 내어 준 자연에 대한 예의였고, 조상 대대로 물림한 가문에 대한 예의였다.
어느새 해는 서편으로 기울며 대청 깊숙이 스며든다. 고향은 그렇게 하루하루 일어나고 저물기를 더하며 제 자리를 지켜 온 게다.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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