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조선의 북방 강역은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이다
압록강 넘어 산삼 캔 평안도 백성…청인들과 충돌, 5명 살해 사건 발생
도강 발생하자 국경 획정 요구한 청…조선 대표로 박권·이선부 보냈지만
목극동 호통에 백두산 오르지 못해…결국 토문강 북쪽에 정계비 못 세워
◆세종 때 압록강~두만강까지 영토확장?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검정 한국사 교과서는 어느 출판사를 막론하고 고려 북방 경계를 압록강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함경남도 함흥 부근까지 그려놓고 있다. 이 지도를 보는 교사나 학생들은 고려는 한반도의 2/3밖에 차지하지 못한 볼품없는 나라로 인식하게 되어 있다. 조선강역도 마찬가지다. 한국사교과서는 조선 강역이 평안북도 일부 지역과 함경북도 지역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상교육 출판사의 《한국사》는 "세종 때에는 압록강 지역에 최윤덕을 파견하여 4군을 설치하고, 두만강 지역에 김종서를 파견하여 6진을 설치하면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143쪽)"고 말하고 있다. 천재교육의 《한국사》도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129쪽)"고 설명하고 있다. 세종 때 4군6진을 개척함으로써 조선영토가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의 최대 북방강역이라는 것이다.
◆느닷없는 간도협약
그런데 뒤에 가면 느닷없이 간도협약 이야기가 나온다. 비상교육 출판사의 《한국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본은 1909년 만주의 철도 부설권, 탄광 개발권 등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간도에 관한 청·일 협정(간도 협약)'을 청과 체결하였다. 이로써 간도의 영유권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청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간도는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이후 만주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258쪽)"
세종 때 압록강~두만강까지 영토가 확장된 것이 조선의 최대 강역이라면 그 북쪽 간도는 조선 땅이 아닌데 일본이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청에게 넘겼다고 모순되게 말하고 있다. 천재교육 출판사의 《한국사》도 마찬가지다.
"대한제국이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후, 간도 문제는 청·일 간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일본은 처음에는 대한제국과 같은 주장을 하였으나, 만주의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 등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간도를 청에 넘겨주었다(1909)"
만주는 고려 때는 물론 조선 때도 우리 강역이 아니었다고 서술해놓고 느닷없이 우리 영토였던 간도를 일본이 청에 팔아먹었다고 주장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백두산정계비 미스터리
조선의 북방강역을 이해하려면 〈백두산정계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미래엔 《한국사:172쪽》는 "간도는 두만강과 송화강 사이에 있는 땅으로 조선과 청은 모호한 경계를 확장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1712)"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과 청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북방강역은 명과 체결한 국경조약에 따라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다.
〈백두산정계비〉는 비문을 세우게 된 경위가 그 내용 못지않게 중요하다. 먼저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는 자체가 조선의 북방강역이 압록강~두만강 북쪽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인조는 병자호란 때인 재위 15년(1637)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 나가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 끝에 항복했다. 조선의 국경이 압록강~두만강까지라면 청나라에서 백두산에 굳이 국경비를 세우자고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청나라에서 국경비를 세우자고 먼저 주장했다는 자체가 조선의 북방영토가 압록강~두만강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도강하는 조선 백성들
청나라가 국경비를 세우자고 주장한 계기는 숙종 36년(1710) 11월 평안도(현 자강도) 위원군(渭原郡) 백성 이만건·이만지·이선의 등이 압록강을 넘어 산삼을 캐다가 청인(淸人)들과 충돌해 5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때 청인 20여명이 위원군 북문 밖까지 몰려와서 이만건·이만지·이선의 등을 인도하라면서 소란을 부렸다. 조선의 관청들은 이들을 제어하지 못했고 이들은 위원군 순라장 고여강을 납치해서 인질로 삼았다. 위원군수 이후열은 청인들을 달래면서 뇌물을 주어 무마시켰다. 뒤에 이 사실을 안 평안관찰사 이제(李濟)는 이만건 등을 체포해 가두고 강계로 이송하여 조사하려 하였다.
이 무렵 변경민들은 자체 무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길에서 이만건 등의 호송행렬을 기다리고 있다가 포를 쏘아서 영솔하던 장리(將吏)를 내쫓고 이만건 등을 탈취해 도주했다. 숙종이 반드시 잡으라고 명령했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좌의정 서종태, 우의정 김창집, 병조 판서 민진후 등 노론 대신들은 청나라에서 문책할까 두려워 청나라에 먼저 보고하자고 청해서 청나라에 이를 알렸다. 숙종 37년(1711) 10월 조정은 이만건 등 5명의 목을 베고 처자들을 종으로 삼고 가산을 적몰한 다음 청에 알렸다.
◆지도를 제작하는 청국
이보다 조금 이른 1689년 러시아인들이 흑룡강 부근에 자주 나타나 충돌하자 청과 러시아는 두 나라 국경선을 획정한 네르친스크조약(Treaty of Nerchinsk)을 체결했는데, 이후 청국에서는 실제 측량에 의한 지도제작에 관심이 높아졌다. 강희제(康熙帝:1662~1722)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프랑스의 지리학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루이 14세는 장 밥티스트 레지(Jean-Baptiste Regis:1663~1738) 신부 등 예수회 선교사면서 지리학자인 신부들을 보냈는데, 만주를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한 지리학자가 레지이다. 간도연구가인 김득황 박사가 레지 신부가 그린 청국 국경을 레지선이라고 명명했는데, 이에 따르면 간도는 확실히 조선령이었다.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이 1737년에 만든 지도도 조선 북방강역이 만주까지 그려져 있다. 레지는 청 왕실의 자금으로 지도를 제작했는데 레지가 조선 북방강역을 압록강~두만강 이북까지 표기한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청사신의 직접 수사
조정에서 청국의 눈치를 보며 도강민들을 강하게 처벌했지만 이는 처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조상 전래로 간도가 조선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변방민들에게 사냥과 산삼 및 인삼 판매 수익은 주요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선 숙종 11년(1685)에는 한득완(韓得完) 등 25명이 강을 건너 인삼을 채취하다가 청국 관원들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청은 사신을 보내 조선 대신들과 함께 재판을 진행해서 한득완 등 6명의 목을 베고 그 가족까지 연좌시키는 중벌을 내렸다. 숙종과 조정 대신들이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일체의 조처를 취하지 않은 반면 변경민들을 직접 관장하는 지방관들은 변경민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숙종과 노론정권은 청 사신이 조사하러 입국하자 함경감사 이수언, 남병사 윤시달, 삼수군수 이관국을 재판하는 건물 바깥에 엎드리게 하고 지방민들과 공모했는지, 일부러 사건관련자들을 석방시켜주었는지 추궁했다. 이때 삼수첨사 조지원(趙之瑗)이 자살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였다. 이때 영의정 김수항과 우의정 정재숭은 조선의 영장(領將)들 10여명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몇 번이나 주청할 정도로 자국민의 목숨은 파리 목숨으로 여기며 청국의 눈치만을 보았다.
◆백두산정계비 건립
이런 상황에서 숙종 36년 이만건 등의 도강 사건이 발생하자 청국은 국경문제를 획정하자면서 숙종 38년(1712) 총관(摠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냈던 것이다. 조정은 박권(朴權)을 접반사(接伴使)로 삼고,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국경을 획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숙종 38년 5월 15일 박권과 이선부는 숙종에게 "접반사와 도신이 뒤쳐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목극등이 조선 대표는 따라오지 말라고 막자 박권과 이선부는 현장에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軍政)〉편의 '백두산정계'에 따르면 "목극등이 박권과 이선부는 나이가 늙었다고 해서 동행을 허락하지 않고 김경문 등을 데리고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조선 대표들은 목극등의 호통에 겁을 먹고 백두산에 따라가지도 못하고 중인 역관(驛官:통역관) 김경문 등만 따라갔다. 역관들의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김경문과 이추(李樞) 등 중인 역관들만 백두산에 올라가 목극등과 정계비 세울 장소를 논의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세워진 것이 〈백두산정계비〉로 조선과 청의 국경이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이 된다[西爲鴨綠江/東爲土門]"는 내용이다. 《만기요람》은 "《여지도(輿地圖)》에는 분계강(分界江)이 토문강의 북쪽에 있다고 했으니 토문강의 발원지에 세웠어야 한다"면서 "그래서 식자들은 그때 아무도 따져서 밝히지 못하고 앉아서 수백 리의 강토를 빼앗긴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정계비를 세운 백두산보다 토문강 북쪽에 정계비를 세워야 했다는 한탄이다. 그러나 이 정계비에 따르더라도 지금의 연변 지역은 모두 조선 땅이다. 토문강은 만주를 가로지르는 송화강의 지류로서 이에 따르면 그 동북쪽 만주 땅은 모두 조선 강역이기 때문이다.
이계(耳溪) 홍양호는 정조 1년(1777) 홍국영에 의해 경흥부사로 좌천되어 《삭방풍요(朔方風謠)》라는 글을 썼는데 여기에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선춘령 밖 정계비가/전란에 불타고 깨어져 들풀들과 뒤엉켜 있음을[君不聞先春嶺外定界碑/獵火燒斷野草縈]"이라고 읊었다.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 선춘령에 윤관이 세운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이 들풀과 뒤엉켜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느냐는 한탄이다. 지금도 홍양호처럼 역사지리에 밝은 정치가나 관료를 찾기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고려·조선국경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이라는 사실을 하는 국민들도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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