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초대석] 한국 스포츠가 세계를 제패하는 방법

입력 2024-08-12 14:27:23 수정 2024-08-12 15:00:23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84년 LA 올림픽 유도 국가대표 6차 선발전 때다. 김재엽 선수는 팔을 꺾는 암바(arm bar) 기술로 상대 선수인 윤익선의 팔을 부러뜨렸다. 사고가 아니라 고의였다. 스포츠 정신에 반하는 잔혹한 행위였다. 그러나 숨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국가대표 선발전은 3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런데 유독 김 선수의 체급만 7차례 선발전을 치렀다. 유도대(현 용인대)의 특정 선수를 뽑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팔을 못 쓰게 해 끝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도 7차 선발전이 열리고, 윤 선수 역시 다시 출전했다.

김재엽은 LA 올림픽에서 은메달,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100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도 세웠다. 하지만 그의 유도 인생은 험난했다. 지방대인 계명대 출신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유도계의 성골은 용인대다. 수많은 유도 선수와 심판을 배출한 데다 유도협회의 주류도 차지했다. 시합이 판정으로 가면 다른 대학 출신은 이길 수 없었다.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란 더욱 어려웠다. 윤동식(한양대), 추성훈(재일교포) 선수 등이 대표적 희생자였다.

한국마사회 유도팀 코치가 되자 김재엽은 이런 악습에 맞섰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소속팀 윤동식 선수가 탈락하자 판정에 불복해 소송을 벌였다. 윤 선수는 1993~1995년 국제대회를 포함해 47연승의 대기록을 세운 78㎏급 세계 최강자였다. 하지만 선발전에서 조인철 선수(용인대)에게 패했다. 유도계의 카르텔에 저항한 김재엽은 결국 유도계에서 축출되고 유도협회 연금도 박탈되었다.

당시 유도계의 실력자인 김정행 전 용인대 총장은 그의 면전에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체육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 후 김재엽은 여러 대학 교수에 임용되었지만 모두 취소되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유도는 잠재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한국 유도는 2012년 런던 올림픽 이후 '노골드'에 그쳤다.

학연, 지연 등의 연고주의는 유도만이 아니라 한국 스포츠계 전체의 고질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보면 안다. 2001년 FIFA 세계 랭킹 37위였던 한국은 2002년 월드컵 4위를 차지했다. 이 기적을 연출한 히딩크 감독의 방법은 간단했다. 오직 실력만으로 대표팀을 선발한 것이다.

축구계의 성골은 고려대다. 하지만 그 리더인 홍명보조차 처음에는 배제되었다. 그는 스스로 후배들과 똑같이 뛰며 실력을 입증한 뒤에야 선발되었다. 한편 무명에 가까운 박지성(명지대), 이영표(건국대) 등이 발탁되었다. 그들은 세계를 놀라게 했고, IMF 외환위기로 좌절에 빠졌던 한국민은 다시 일어났다.

히딩크호는 축구가 아니라 나라를 바꿨다. 그러나 축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히딩크는 한국을 떠나며 박항서 수석 코치를 후임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감독의 선수 선발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박항서는 결국 한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갔다. 히딩크의 핵심 원칙이 다시 무너진 것이다. 한국 축구는 이번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후 40년 만의 참사였다.

축구협회는 최근 새 국가대표팀 감독에 홍명보 울산HD 감독을 임명했다. 대표팀 감독은 축구협회 전략강화위원회의 추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임생 기술총괄이사가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놀라운 것은 홍명보 감독도 이를 수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축구협회의 행태를 비판해 왔고, 대표팀 감독이 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와 정몽규 회장, 이임생 이사는 모두 고려대 출신이다. 홍 감독은 축구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조직 열하나회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이번 파리 올림픽은 우리 선수들 때문에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들은 거침없이 도전하고, 쿨하고, 당당했다. 하지만 배드민턴협회의 후진성과 강압성에 대한 안세영 선수의 비판은 통렬했다. MZ세대의 한국 스포츠가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양궁협회를 이끈 정의선 회장이 하나뿐인 게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