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59>툭 트이고 소탈한 가운데 이치가 있다

입력 2024-08-07 09:53:35

미술사 연구자

김윤겸(1711~1775),
김윤겸(1711~1775), '장안사(長安寺)', 1768년, 종이에 담채, 27.5×3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안사'로 여기가 어디인지를 써넣고, 호 '진재(眞宰)'로 서명한 김윤겸의 진경산수화다. 장대한 2층 전각이 두 채나 되고 계곡을 향해 세운 높다란 누마루 등 한눈에도 규모가 대단하다. 내금강 유람이 시작되는 곳인 장안사는 금강산 절집의 본산인 유점사, 만폭동 어귀의 표훈사, 외금강의 고찰 신계사와 함께 금강산 4대 명찰로 꼽혔다.

장안사가 번창하게 된 계기는 고려 말 원나라 순제(1333~1370 재위)의 황후인 기황후의 후원이었다. 원래 고려인인 기황후는 원나라에 궁녀로 뽑혀 갔다가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렇게 웅장했던 장안사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모조리 불타 지금은 주춧돌과 몇 개의 비석, 승탑만 남아있다고 한다.

금강천 계곡을 끼고 자리 잡은 장안사는 무지개다리인 비홍교(飛虹橋)를 건너 들어갔다. 내금강의 물이 모여 한꺼번에 내려오는 금강천이라 여름이면 수량이 엄청나 이렇게 긴 다리를 높고 둥글게 돌로 쌓아 만들었다. 길이가 18m(60척), 높이가 11m(36척), 너비가 3.6m(12척)에 달해 처음 보는 사람들은 크기와 육중함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내금강의 상징처럼 여겨진 비홍교는 정선, 심사정, 김윤겸 등의 장안사 그림뿐아니라 금강전도에 대부분 나온다.

김윤겸의 '장안사'를 보면 장안사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들어간다는 것, 계곡 가에 자리 잡았다는 것, 주변에 전나무가 무성하다는 것, 저 멀리 일만이천봉이 보이므로 내금강에 있다는 것 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실경임은 분명하지만 어느 한 지점에서 스케치한 풍경이 아니라 장안사와 관련된 지리적, 인문적 정보를 통합해 전지적으로 시각화했다.

비홍교는 다리를 건너기 전 비스듬히 쳐다본 시점이고, 장안사는 비홍교 위에서 바라본 광경이며, 주변 산세는 장안사 산영루(山映樓)에서 석가봉, 지장봉, 관음봉 등을 둘러보는 시점이다. '장안사'는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장안사를 일목요연하게 시각적으로 설명해주는 인지적 재구성으로서의 실경이다.

김윤겸은 금강산을 비롯해 서울 근교, 단양, 영남의 명승지 등 많은 진경산수를 남겼다. 겸재 정선의 영향을 받았다. '장안사'는 김윤겸이 금강산의 명소를 12점으로 그린 '금강산화첩' 중 한 폭이다. 현재는 8점만 전한다. 그림의 오른쪽 위 '김이례인(金履禮印)'은 김윤겸의 후손이 찍었다. 나중에 이 화첩은 추사 김정희 소장품이 된다.

김윤겸의 진경산수는 겸재 정선과 달리 느긋한 필치와 묽은 담채의 슴슴한 맛이 특징이다. 시서화 삼절이자 18세기 최고의 미술평론가였던 강세황은 김윤겸의 이런 화풍을 '소솔중유치(疏率中有致)', 곧 "툭 트이고 소탈한 가운데 이치(理致)가 있다"라고 평했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