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58> 라 퐁텐의 우화, 앙드레 프레빈 '포도밭'

입력 2024-07-08 10:22:06 수정 2024-07-08 15:15:25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포도밭 이미지.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포도밭 이미지.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고 천둥 번개가 치더니 한줄기 소나기가 퍼붓고 지나간다. 무더위 속으로 투명한 비의 알갱이들이 여름의 열매처럼 짓이겨져 쏟아진다. 저기 높은 하늘에 포도원이 있어 수확의 축제가 열리는 것 같다. 맑은 즙에서 짙은 향내가 풍긴다.

포도는 고대부터 풍요와 쾌락의 상징이었다. 성경에서도 포도나무는 생명의 나무이며 말씀을 포도송이에 비유했다. 예수의 첫 기적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다.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주님의 포도밭을 짓밟는 멧돼지라고 비난했다. 라틴어로 파지나(pagina)는 페이지라는 말로 포도밭 이랑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면 포도밭은 궁극의 책이라는 말이다. 이 책은 음성을 기록한 살아있는 책이다. 포도밭 길 순례는 묵상의 길이며 지혜를 향하는 길이다. 이렇게 상징은 너머의 세계로 걸쳐놓은 사다리 같은 것이 된다.

바이올린 소나타 '포도밭'은 라퐁텐(1621~1965)의 우화를 텍스트로 음악을 만들었다. 우화는 교훈적이며 그 시대를 반영한다. 라퐁텐이 이솝의 우화를 각색하고 발전시켰듯이 앙드레 프레빈(1929~2019) 또한 라퐁텐의 평면적인 우화를 입체적이고 개성적으로 음악화했다. 1990년대 중반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이 앙드레 프레빈의 '포도밭'을 대구에서 초연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그가 만드는 윤기 나는 음색이 단숨에 볕 좋고 물이 잘 빠지는 포도원을 눈앞에 펼쳐놓았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듯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있는 포도밭 이랑을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포도나무와 잎사귀를 헤치고 가는 여우의 시선을 따라가며 여우의 맥박과 호흡, 심장의 두근거림, 다급한 걸음을 표현했다. 라퐁텐의 이야기가 음악으로 전환되면서 단숨에 시각과 촉각, 미각, 후각을 자극하는 새로운 감각의 장이 열렸다. 음악은 영상을 보듯 원경에서 근경으로 접근하며 포도원의 정경과 뙤약볕 아래 익어가는 포도송이의 열기와 향기까지 전하며 참신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를 들려주었다. 소리가 생명이고 정기이며 에너지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혈관과 뼛속에 새겨진 그의 바이올린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어 안타깝다.

음악은 번역이 필요 없고 시대와 장소,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는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여름 별장 상수시 궁전이 주인공들의 사랑과 미래를 확인하는 장소로 등장했다. 상수시 궁전은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 양편에 포도나무가 층층이 심겨 있다. 상수시(Sanssouci)는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음악 애호가이자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대왕이 국정의 짐을 내려놓고 볼테르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지성과 토론을 즐기고 에마누엘 바흐의 반주에 맞춰 플루트를 연주하던 곳이다. 아버지 바흐도 이곳에 불려 와 왕의 요청에 따라 즉흥곡을 연주했다. 왕은 이곳을 포도송이와 잎사귀, 예술과 철학으로 둘러싸인 풍요의 낙원으로 만들고 싶었으리라. 예술은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