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대 100주년 시계탑 기념관 역사전시실에는 재학생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이들의 흔적을 남겨 둔 공간이 있다. 탈색된 군복, 빛바랜 일장기, 전쟁 중에 찍은 단체 사진 등이 전시됐다. 특히 엄마를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편지 앞에서 방문객이 머무는 시간은 길어진다. 침략 전쟁 여부를 떠나 일본인이라면 조국의 부름에 응했던 그들을 이곳에서 되새길 것이었다. 일본이 저지른 태평양전쟁을 미화할 의도는 없지만, 조국의 위기에 헌신(獻身)한 이들을 기억하고 예우하는 법을 아는 일본에 시기(猜忌)가 인 것만은 분명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소년소녀병을 예우하자는 법률안 통과가 이다지도 지난(至難)한 과정이어야 할까. 16대 국회 이후 관련 법안이 지속적으로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22대 국회에서는 강대식 국민의힘 의원(대구 동구군위을)이 총대를 멨다. 6·25 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 제정안 등 '6·25 참전 소년소녀병 유관 3법'이다. 발의 의원 10명 모두 국민의힘 소속이다.
소년소녀병 또는 그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국가유공자 단체에 '6·25 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를 추가하자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음에도 6·25전쟁 뒤 다시 징집(徵集)된 경우도 있었던 터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 정도였다. 영화 '포화 속으로' '장사리'에 등장하는 학도병보다 더 어렸다. '중 2병'을 겪을 사춘기 청소년들이 조국의 참상(慘狀)에 분연(奮然)히 나섰던 것이다. 대부분 칠곡 다부동전투에 투입됐다. '워커라인'이라는 낙동강 전선의 최선두였다. 이곳이 무너졌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공로(功勞)를 기억하고 후세에 남기는 국가 주도의 기념관은 없다. 후손이 사비로 기념관을 세운다. '인천 소년병 이경종 기록관'이 일례(一例)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한다지만 소년소녀병들에게 병적(兵籍)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군번(軍番)도 남아 있다. 130년 전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명예 회복 등에 지극정성이면서, 논란의 여지가 큰 민주유공자법 재발의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면서 소년소녀병의 결기(決起)에 왜 이렇게 뭉그적거리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1870~71년 보불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에 점령된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소설 '비곗덩어리'에는 희생을 당연시하는 상류층의 위선이 담겼다. 소설에는 피난길에 나선 무리가 등장한다. 정치인, 귀족, 성직자, 혁명가를 비롯해 창녀도 있었다. 이들은 중간 기착지에서 프로이센군 장교에 발목이 잡힌다. 통행허가권을 쥔 장교는 창녀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창녀는 조국을 짓밟은 프로이센군 장교를 거부한다. 피난은 기약 없이 미뤄진다. 평소 창녀를 무시하며 비곗덩어리로 불렀던 일행은 그녀에게 고결한 희생을 강조한다. 마침내 창녀 덕분에 이동이 가능해진 이들은 그러나 감사는커녕 그녀를 모른 척한다.
6·25 참전 소년소녀병을 대하는 대한민국이 겹친다. 젊으니까 나라를 지키는 게 당연한 듯 여기며 헌신을 강요하는 건 국가적 폭력이다. 소년소녀병들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고 종국에는 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있으니 마땅히 그래야 했다던 이들이다. 3만 명에 달하던 이들은 전후 70년이 지난 현재 2천 명이 채 안 될 것으로 추정된다.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면 시간만 흘려보낼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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