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K의료의 위기

입력 2024-06-26 19:30:00 수정 2024-06-26 20:01:20

이호준 편집국 부국장

이호준 편집국 부국장
이호준 편집국 부국장

정부와 의료계가 의대 증원을 놓고 넉 달 넘도록 싸우는 사이 K의료가 골병 들고 있다. 둘 다 '국민과 환자를 위해서'라는 이유와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국민과 환자는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의 한국 의료 시스템도 마비될 판이다. 병원들은 더 나은 시설과 서비스를 확충하고 업그레이드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뒷걸음질하고 있다. 시설 투자 지연·중단, 장비 구입 최소화, 신규 사업 축소 및 연기 등의 비상경영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게 K의료의 현실이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의 최근 현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공의 수련병원인 국립대병원과 사립대병원 47곳 중 75%에 해당하는 35곳이 비상경영을 선포한 상태다. 일반 병동 통폐합·축소, 중환자실 병상 축소 운영, 수술실·회복실 통폐합 운영, 진료과 축소 운영, 병상 수 조정, 긴급 치료 병상 확충 계획 보류, 근무 시간 단축, 야간근로·당직 근무 축소 등 '연명' 경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공의 이탈, 의대생 수업 거부 사태에 따른 상당한 후폭풍도 우려된다. 지난 2월 의대 증원 발표 후 떠난 전국 1만 명에 이르는 전공의가 아직 복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전임의, 전문의 배출 문제를 불러 향후 수년간 의료 공백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수업 거부 중인 의대생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유급될 경우 전국 의예과 1학년 3천 명과 내년 신입생 4천500명(의대 증원분 1천500명 포함)을 합쳐 7천500명이 내년에 1학년 교육을 받아야 한다. 예년 의대 정원의 2.5배다. 교수진·시설 부족에 따른 교육 질 저하 등 현장 혼란이 불가피하다. 과밀학급에서 수업 및 실습을 하며 6년을 보낸 뒤엔 전공의 취업 대란 사태에 직면해야 한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건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를 선결 과제로 고집한 의료계의 책임도 있지만, 필수의료 개선이라는 본질보다 의대 증원이라는 현상에 매몰된 채 유연하지 못한 대처를 한 정부의 잘못도 크다. 오죽했으면 보다 못한 환자 단체가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증원 및 2천 명이라는 숫자 집착에 일침을 가했겠는가.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최근 "정부가 갑작스레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2천 명이라는 숫자에만 매몰됐다"고 꼬집은 바 있다.

다행히 정부도, 의료계도 한발 물러서는 분위기다. 대한의사협회는 27일부터 돌입하기로 한 무기한 휴진을 일단 유예, 29일 예정된 의대 교수와 전공의, 시도의사회 대표 등 3명이 공동위원장을 맡은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회의 결과를 보고 향후 투쟁 방향을 결정하기로 했다. 정부도 의료계 소통 창구를 일원화한 특별위원회 구성을 계기로 의료계와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기로 했다.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누구나 언제든 싸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K의료를 붕괴 위기에서 살릴 수 있는 기회다.

대학별 입시 시행 계획이 이미 확정돼 2025년 의대 증원 백지화나 원점 재검토가 불가능하다는 걸 의료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협상 가능성이 없는 의제를 계속 요구하는 건 대화 의지가 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부 역시 의대 증원에 발목 잡혀 의료 체계가 무너진다면 의료 개혁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모를 리 없다. 앞서 의대 정원 규모, 시기 등 조정이나 협의 여지, 기회가 있었지만 양쪽 모두 놓쳤다. 부디 이번엔 어렵게 조성된 절호의 대화 및 합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