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한윤조] 문화 지원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때

입력 2025-06-18 17:38:49 수정 2025-06-18 19:39:56

한윤조 문화부장
한윤조 문화부장

"문화예술 지원이라는 게 정권 혹은 자치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고무줄처럼 오락가락하니 장르를 막론하고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작품 하나 못 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며칠 전 만난 지역 문화계의 한 어른이 푸념처럼 내뱉은 말이다. 최근 서울 혜화동의 대학로 소극장에서 시작한 한국산 뮤지컬 작품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 6관왕을 휩쓰는 등 K-문화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대화를 나누던 중에 튀어나온 씁쓸한 멘트였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어쩌면 해피엔딩'의 수상 소식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만큼이나 대한민국 문화사(文化史)에 길이 남을 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를 마냥 희소식으로만 받아들여선 안 될 것 같았다. 그 속엔 처절한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비수가 하나 꽂혀 있단 느낌이랄까.

'어쩌면 해피엔딩'의 낭보가 전해진 후 언론 등에서는 창작 뮤지컬에 대한 단계별 지원책 구축과 해외 진출 확대 등의 정책들이 마련돼야 한다고 앞다퉈 떠들고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꼬집어 보자. 지원이 '없는 게' 아니라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 아닌가?

리딩부터 시작해 체계적으로 창작 뮤지컬을 키워 내는 시스템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이 전국적으로도 가장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문제는 적절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비 사정에 따라 예산이 오락가락하는 데다 시비 지원도 소폭 감소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예산은 2022년과 2023년 32억7천만원을 최고로, 올해는 29억5천만원으로 3억2천만원이나 감소했다.

각 시도 및 구군 문화예술기관들도 앞다퉈 '창작' 작품 제작에 매달리지만 작품성을 기대하긴 애초부터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막혀 있다.

생각해 보니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한때 '창작'이라는 단어만 붙어도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각 지자체마다 콘텐츠 사업을 육성한답시고 지역의 전설, 혹은 역사 속 인물, 지역 특산물이나 상징물 등을 내세워 '창작' 뮤지컬, '창작' 오페라 등의 무대를 우후죽순 내놓는 일을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교과서적이고 틀에 박힌 서사에 혀를 내둘렀던 적도 상당수다. 쪼개고 쪼갠 쥐꼬리만 한 예산을 갖고 '관객 맞춤형'이 아닌 '지자체장 입맛 맞춤형'으로 제작해 내려는 관행이 뿌리 깊게 자리 잡다 보니 정작 예술인들의 창작혼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문화계의 실상을 살펴보면 지자체장 혹은 예술기관장이 '어디에 관심이 꽂히느냐'에 따라 콘텐츠의 향방은 갈지(之)자 걸음을 한다. 수십 년간 사용하고 있던 제목을 버리고 새롭게 이름을 바꿔 다는가 하면, 캐릭터를 새롭게 만들어 이를 홍보하는 뮤지컬을 만들기도 한다. 매년 역사 속 인물만 바뀌는 뻔하디뻔한 역사 오페라는 수없이 만들어지고, 수억원의 예산을 퍼부어 일회성 공연에 그치기를 반복한다. 사업의 연속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때그때 지자체장의 입맛에 맞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모양새만 맞추는 형국이다. 과연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걸출한 작품 하나가 나오기를 기대하겠는가.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은 단순한 '운빨'이 아니라 기획 단계부터 글로벌 무대를 목표로 세심한 설계와 과감한 투자가 이어진 결과라고. 그렇다면 기획 단계에서부터 지자체장 혹은 예술기관장의 '의도'를 배제한 백지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