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은 채 쓰는 ‘암중취호’ 꾸준히 작업
책 ‘공산묵력’ 발간…28일 출판기념회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삶 살아갈 것 강조”
매일 새벽 일어나 먹을 갈고 종이를 편다. 가부좌를 틀고 합장한 채 마음을 가다듬으며 필신(筆神)이 오길 기도한 뒤, 힘찬 붓질이 시작된다.
올해 여든일곱의 남석 이성조 서예가는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붓을 들고 작업에 몰두한다. 꼿꼿한 허리와 빛나는 눈빛, 맑고 천진난만한 웃음,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여전하다. 2018년 밀양문화재단 초대전 이후 6년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그를 최근 그의 자택이자 작업실인 팔공산 아래 공산예원에서 만났다.
밀양 전시 이후 위암 수술을 받았던 그는 몸이 거의 회복된 상태라고 말했다.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숨 쉬듯이 해왔던 작업을 쉬는 것이 오히려 힘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마저 사라져버릴 것 같았지요. 나이와 관계 없이 필묵을 떠나선 안되는 겁니다."
그는 10년 전부터 이어오고 있는 '암중취호(暗中醉豪)' 필법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한 번 몰두하면 수시간씩, 20~30개의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암중취호는 눈을 감은 채 글씨를 쓰는 그만의 필법. 그가 'ㄱ'자 형태로 꺾어 만든 붓 '필령(筆靈)'이 도구가 된다. 그는 "바늘 귀를 끼우거나 총을 쏠 때, 한쪽 눈을 슬며시 감으면 오히려 초점이 잘 맞다"며 "또 양쪽 눈을 감으면 생각이 더 선명해진다. 그 심상들을 표현하는 방법이 괜찮은 것 같아 계속 이어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지역 서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55세 되던 해, 갑작스럽게 모든 외부 활동을 접은 채 팔공산에 작업실을 지어 칩거를 시작했다. 학연, 지연, 금(金)연이 만연한 서예 공모전의 민낯을 지켜보며 '대한민국 서예계는 망했다'고 되뇌면서.
공산예원에서 작업에 몰두해온 그는 2000년대 초, 마침내 역작을 완성한다. 글자 수만 6만9천384자에 이르는 168폭의 묘법연화경 병풍이 그것. 일반 병풍보다 각 폭이 넓어, 다 펼치면 120m에 달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치 한 호흡에 쓴 듯 모든 글자가 흔들림 없이 일정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2007년 고희전(古稀展) 당시 그 병풍을 공개해 세간에 놀라움을 안겼던 그는 올해 서예 인생의 고희를 맞았다.
그의 서예 인생 70년을 기념하는 책 '공산묵력'이 최근 발간됐다. 김진혁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장과 시인인 박진형 만인사 대표, 기자이자 문필가인 이춘호 화가, 이인숙 미술사 연구자, 박기섭 시조시인이 그의 70년 서업을 각자의 시각으로 묘사했고, 이를 석용진 서예가가 모아 책으로 펴냈다. 출판기념회는 오는 28일 오후 6시 30분 팔공산 블루문레스토랑에서 열릴 예정이다.
내년이면 미수(米壽)를 맞는 그는 기념전을 열 계획이 없냐는 질문에 "내놨을 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 많아야하는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항상 후학들에게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헤쳐나가라'고 강조합니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치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면 안됩니다. 이는 서예가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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