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우리 역사 되찾기] 대신라(통일신라) 북방강역은 어디까지?

입력 2024-06-10 11:53:56 수정 2024-06-11 08:11:31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최치원 "신라 영토 고죽국과 맞닿아 있다"

최치원 초상, 정읍 무성서원에 봉안된 것으로 고종의 어진을 그린 채용신이 그린 것이다.
최치원 초상, 정읍 무성서원에 봉안된 것으로 고종의 어진을 그린 채용신이 그린 것이다.

현재 사용하는 검정 한국사 교과서 중 가장 많은 학교에서 사용한다는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676년)(43쪽)"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이 교과서뿐만 아니라 현재 사용 중인 모든 검정교과서가 동일하다. 이 한국사 교과서는 뒤이어 "신라의 삼국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인 당을 끌어들이고,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땅 대부분을 잃었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띤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역시 모든 검정교과서가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서 모든 검정교과서는 "민족문화가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신라 통일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지금 사용하는 검정교과서에 국한된 서술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 때 숱한 논란을 낳았던 국사편찬위원회의 국정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는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영토는 대동강 하구에서 원산만 이남으로 제한되었고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요동 지역을 상실하고 말았다(51쪽)"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고구려와 백제 문화가 신라 문화에 융합되면서 민족문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라고 썼다. 현재의 검정교과서나 과거의 국정교과서나 신라의 삼국통일 결과 민족사의 강역이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되었지만 민족문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통일강역은 과연 대동강 이남까지였을까?

신라 최치원의 [양위표]로 보는 신라 서쪽 강역 지도.
신라 최치원의 [양위표]로 보는 신라 서쪽 강역 지도.

◆대신라(통일신라)의 북방강역, 어디까지였을까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와 바른역사학술원은 2024년 5월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를 발간했다. 이 책에서는 '통일신라'라는 용어 대신에 '대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발해'라는 용어 대신에 '대진'(大振:大震)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발해는 당나라에서 부른 국명인 반면 대조영(大祚榮) 등 건국세력이 지은 국명은 대진국이었다. 고구려가 신당연합군에 망한 것은 668년인데 불과 30년만인 698년 대진이 건국했다. 기존교과서는 발해의 건국으로 남북국이 성립했다면서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남북국의 성립은 신라가 민족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다른 대국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에 '대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고구려의 뒤를 이어 대진이 건국했기에 '두 나라 시기'가 열렸다고 표현했다. 두 나라 시기 대신라의 북방강역은 어디까지였을까?

현재 사용하는 대부분의 교과서는 대동강 이남까지가 통일신라의 북방강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진흥왕은 재위 28년(568) 함경도 장진군 황초령까지 진출해 황초령 순수비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더 동북쪽인 함경도 이원군 동면 운시산에 마운령 순수비를 세웠다. 그런데 100여년 후에 삼국통일을 했다는 통일신라의 강역이 대동강 하구에서 원산만 이남까지라면 황초령과 마운령 강역을 모두 빼앗긴 것으로서 영토가 크게 축소된 것을 의미한다. 신라 사람들은 숱한 전쟁 끝에 영토를 크게 빼앗긴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두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위대한 군주라고 크게 칭송했을까?

◆통일신라 강역은 평양 이남?

훗날 신라의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이 되는 김춘추는 신라 진덕왕 2년(648) 군사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당의 장안(長安:서안)을 방문했다. 이때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金文王)까지 데려갈 정도로 군사지원에 필사적이었다. 김춘추는 당 태종과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의 영토 협정을 맺었는데 그 내용이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11년(671)〉조에 실려 있다. 당 태종이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我平定兩國 平壤已南百濟土地 並乞你新羅 永爲安逸]"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이때의 평양(平壤) 이남을 대동강 남쪽으로 생각해서 신라 통일강역이 대동강 남쪽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통일신라의 강역은 대동강 이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한국 역사학계의 식민사학 추종 정도가 심화되면서 '대동강 이남'이라는 해석에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대동강 이남이 아니라 임진강 이남까지이며 고구려 강역은 전혀 차지하지 못했고 백제강역만을 차지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신라는 백제강역만을 차지했을 뿐이므로 '평양 이남'이라는 표현은 사족에 불과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역사비평》 128, 129호, 2019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도 하지 못하던 주장이 2000년대 들어서 버젓이 전개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 우리 역사를 무조건 축소하는 것이 한국 역사학계의 거센 흐름이 되었다. 일본 문부성 장학금이나 일본 극우파 사사카와 재단의 장학금으로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외형은 한국인들이 역사학계에 대거 유입된 결과이다.

◆평양 이남의 '평양', 고구려 평양성?

사료들이 신라가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에 임진강 이남만을 차지했다고 전한다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하는 사료에는 '임진강'은커녕 '대동강'이란 표현도 없다. 있다면 '평양 이남'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때의 평양은 어디를 뜻하는가?

고구려와 전쟁한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 〈고구려 열전〉은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에서 나왔다. 그 국도는 평양성인데 곧 한 낙랑군 옛 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한 낙랑군이라고 본 이 내용은 중요하다. 그간 '기자조선의 도읍지=위만조선의 도읍지=한 낙랑군=평양'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해서 장수왕이 재위 15년(427) 천도한 평양성을 현재의 고구려 평양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요녕성 요양이라는 주장들이 나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과연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인가?

이 평양성의 위치를 찾는데 중요한 나라가 북위(北魏:386~534)이다. 북위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이었던 선비족(鮮卑族)의 탁발씨(拓拔氏)가 세운 나라로서 위(魏)를 세웠는데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와 구분해서 북위라고 부른다. 나중에 거란족이 세운 요(遼:916~1125)나라 정사가 《요사(遼史)》인데, 그 지리지의 〈동경도(東京道)〉에 "원위(元魏)의 태무제가 보낸 사신이 고구려왕이 거주하는 평양성에 이르렀는데, 요나라 동경이 원래 이곳이다."고 말하고 있다. 원위(元魏)는 북위의 다른 표현인데,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재위 471~499)이 낙양(洛陽)으로 천도해서 중원을 차지한 후 탁발씨를 원씨(元氏)로 바꾸고 복식도 선비족의 복장에서 한족(漢族)으로 바꾸어 입고, 언어도 선비어를 버리고 한어(漢語)를 사용하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사용했다. 황실의 성씨를 원씨로 바꾸었다고 해서 원위(元魏)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북위의 3대 황제 탁발도(拓跋燾:재위 423~452)가 태무제(太武帝)인데 그가 고구려 평양성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곳이 요(遼)나라 동경(東京)자리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 학계는 요나라 동경을 요녕성 요양시라고 비정(比定)하고 있다. 《구당서》 〈고구려열전〉과 《요사》 〈지리지 동경도〉를 정리하면 고구려 평양성은 옛 낙랑군 옛 땅인데 그곳은 요나라 동경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遼)나라 동경이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까지 왔을 개연성은 희박하다. 이는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의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고려 북방강역을 지금의 압록강에서 함경남도 원산만으로 축소한 것을 전제로 요나라가 요녕성 요양까지 진출했다고 보는 것이다. 고려는 요양 북쪽의 심양까지 차지했으므로 요나라가 요양에 동경을 설치할 수는 없었다.

◆백이숙제의 고죽국과 신라 강역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구당서》는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낙랑군 옛 땅이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 의미 있는 사료는 청나라 고조우(顧祖禹:1631~1692)가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이다. 《독사방여기요》는 그 이전의 수많은 역사지리 서적을 가지고 편찬했는데,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에 있던 영평부(永平府)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노룡현 신창성(新昌城:지금 영평부를 다스리는 곳이다……)수(隋)나라에서 노룡현으로 개칭했다. 또 조선성(朝鮮城)이 있는데, 영평부 북쪽 40리이고,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

청나라 때 하북성 노룡현 북쪽 40리에 있던 신창성이 한나라 낙랑군 속현인 조선현 자리라는 뜻이다. 곧 낙랑군 조선현이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 북쪽 40리에 있었다는 뜻이다. 중국 학계는 하북성 노룡현이 백이(伯夷)·숙제(叔齊)의 고죽국(孤竹國)이 있던 자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 고죽국과 신라에 대해서 최치원이 작성해 당나라에 전달한 진성왕의 〈양위표(讓位表)〉가 설명하고 있다. 최치원의 이 〈양위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데 신라강역에 대해서 "또한 백이숙제의 고죽국과 (신라의) 강토가 연달아 있었다[且夷齊之孤竹連彊]"고 말하고 있다. 신라 강역이 과거 고죽국이자 낙랑군 조선현 자리인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까지 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강역은 대신라 말기 진성왕 때의 강역이라기보다는 백제, 고구려 멸망 직후의 강역일 것이지만 대신라의 강역을 지금의 대동강까지도 차지하지 못하고 임진강까지였다고 우기는 이 땅의 식민사학자들이 보기에는 기절초풍할 일일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필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정사인 《구당서》, 《요사》 및 역사지리지 《독사방여기요》나 최치원의 〈양위표〉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대신라 강역에 대해 보다 세밀한 연구가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