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인력거·지게꾼 몰린 여름날 대구역 광장

입력 2024-05-30 12:56:44 수정 2024-05-30 17:47:19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5월 14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5월 14일 자.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대동권번에서 각각 7대씩을 내어 14대가 아침 6시부터 밤 10시5분의 막차 시간까지 기다려서 원번으로 나가고 있는데 평균 하루 한 원번을 못 돌고 있다. 한 번에 500원에서 최고 700원을 받아 주인과 반분하고 있는데 그래서 대반 점심도 못 사 먹고 차에 누어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5월 14일 자)

대구의 관문인 역전 광장은 단순히 철도 승객이 오가는 장소는 아니었다. 사시사철 사람 사는 모습의 일상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곳이었다. 대구를 찾아오고 떠나는 사람들의 희망과 아픔, 욕망이 두루 뒤섞인 공간이었다. 게다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달픔도 광장에 내려앉은 터였다. 5월을 보내고 여름을 맞는 대구 역전 풍경은 어땠을까. 그 풍경은 민생고에 지친 사람들의 고달픈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구역에 내리는 승객들 앞에는 인력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력거꾼들은 아침 6시 첫차로 하루를 열고 밤 10시5분 도착하는 막차로 일과를 끝냈다. 승객의 도착을 기다리는 인력거는 오늘날 택시와 유사했다. 인력거는 한 번 이용에 500~700원의 요금을 받았다. 당시 남자 고무신 한 켤레가 950원이었던데 비하면 일반 부민들에게는 부담되는 요금이었다. 하지만 하루 한두 번 운행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아 인력거꾼이 손에 쥐는 수입은 많지 않았다. 그 수입조차 인력거 주인과 반반으로 나눴다.

인력거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대구 역전에는 모두 14대의 임대 인력거가 운행되고 있었다. 그중 절반인 7대는 대동권번 소유였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 생긴 대구의 대표적인 기생조합이었다. 한때 번성했던 권번은 1949년 고급 유흥업의 영업 금지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일자리를 잃은 기생들은 대부분 권번 대신 일반 업소의 접대부로 전직했다.

권번 고객과 기생들이 이용했던 인력거는 단번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권번 창고에 세워두어야 했던 인력거는 열차 승객을 태우는 임대용 탈것으로 돈벌이에 투입됐다. 인력거꾼들은 번 돈의 절반을 인력거 임대료로 냈다. 인력거꾼들은 수입이 적어 제대로 된 점심 한 끼도 먹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대구 역전에는 인력거꾼뿐만 아니라 짐을 지고 나르는 지게꾼도 적잖았다. 지게꾼은 돈을 내는 지게꾼과 그렇지 않은 지게꾼 두 부류가 있었다. 하루 40원씩 돈을 내는 지게꾼은 차표를 거두는 집찰구 앞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나오는 승객을 바로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지게꾼은 집찰구와 한참 떨어진 곳에서 손님을 기다려야 했다. 하루 한두 짐 얻기가 어려웠던 지게꾼은 열차 도착 시간 외에는 인근 대구 공회당 구석이나 역전 변소 뒤에서 낮잠 자는 일이 다반사였다.

역전에는 구두닦이도 쉽게 눈에 띄었다. 열차서 내린 승객이나 기차를 기다리며 구두를 닦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흙길을 다니는 경우가 많다 보니 구두가 쉽게 더러워졌다. 더구나 그 시절 광이 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면 자칭 신사임을 과시하는 표시이기도 했다. 구두닦이 역시 날마다 50원을 내면 지게꾼처럼 역 구내 출입이 자유로웠다. 돈은 누가 거뒀을까. 거지나 넝마주이의 우두머리인 '왕초'였다. 역 구내의 구두닦이는 일을 시작하기 전 왕초에게 돈을 미리 냈다.

대구역 광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엿이나 떡, 밥 등의 각종 음식물을 파는 부인네와 아이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길목이 나뉘어 있어 역광장보다는 사람 왕래가 적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틈만 나면 음식을 많이 팔려고 역광장으로 뛰어들었다. 역광장은 애초 이들이 들어갈 수 없었기에 쫓겨나기 일쑤였다. 음식 장사는 아이와 부인네 벌이로는 괜찮다는 소문이 났다. 하루에 평균 300~400원 치를 팔아도 4할의 높은 이윤을 남긴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없는 사람은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는 말이 그 시절에 나돌았다. 여름이 되면 보릿고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가 담겨있다. 춘궁기나 맥령기로 불린 보릿고개는 한해 전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이 났고 보리는 여물지 않은 상황으로 보통은 5~6월까지 이어졌다. 인력거와 지게꾼, 부인네와 아이들까지 생존을 위해 몰린 여름날의 대구 역전은 보릿고개를 지나도 나아질 게 없었다. 이렇듯 민생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계절을 탈 리가 없다. 지금인들 다르랴.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