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On] 꼭두각시 국회의장 되려나…중립 내던진 의장 후보들

입력 2024-05-10 06:30:00 수정 2024-05-10 22:32:20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4명 등록…모두 중립 포기
◆국회의장의 정체성은 '중립'과 '선수'
◆중립 포기하면 다수의 횡포에 노출…민주주의 기본 망각

김진표 국회의장이 2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김진표 국회의장이 2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국회의장은 2002년 이후 법적으로 중립의 상징이다. 국회는 2002년 국회의장은 당적을 가질 수 없도록 국회법을 개정했다. 의사 진행을 책임지는 국회의 대표로서 당파성에서 최대한 벗어나 공정하게 운영해 달라는 국민적 요구가 반영됐다.

국회의장의 중립성 확보는 대한민국 정치의 숙제였다. 독재와 권위주의 정치 체제 속에서 국회의장은 정부와 여당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직위였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국회의장의 역할도 변화가 필요했다.

고(故)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2000년 16대 총선 이후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장이 된 후 "나는 한 번은 여당을, 또 한 번은 야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보고 양심의 의사봉을 친다"는 말을 남겼다. 그만큼 국회의장의 중립성에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였다.

◆깨질 위기에 처한 국회의장 전통

2002년 국회법 개정 이후 국회의장은 중립적 입장에서 여야와 밀당했다. 때론 다수당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했지만 소수당도 배려했다. 출신 정당 만을 감싸지 않으려고 애썼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여야 합의를 중시했다.

국회의장은 원내 1당 최다선 의원이 맡아 왔다. 최다선이 여럿이면 물밑 조정을 거쳐 결정하거나 형식적인 경선으로 뽑았다. 21대 국회에서는 전반기에 6선인 박병석 의원이, 후반기에 5선 중 연장자인 김진표 의원이 맡았다.

두 의원 모두 당파성이 덜하고 합리적인 덕분에 진영 논리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는 인물이었다. 지난 22년간 쌓았던 '중립'과 '선수(選數)'는 국회의장의 정체성이 됐다.

하지만 22대 국회의장은 중립과 선수 우선 전통이 모두 파괴될 공산이 커졌다.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에서 출사표를 던진 의원들이 모두 '중립 전통'을 벗어던지겠다고 공언한 탓이다.

국회의장 후보 등록을 한 후보는 조정식(6선) 의원과 추미애(6선) 당선자와 우원식(5선)·정성호(5선) 의원 등 4명이다. 이들 후보들은 모두 여야 합의보다 거대 야당 중심의 의회 운영에 방점을 찍고 있다.

추 당선인은 총선 직후부터 국회의장의 중립 무용론까지 펴고 있다. 조정식 의원은 이재명 대표와 호흡을 강조했다. 정 의원과 우 의원도 이 대표와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당리당략에 따르지 않고 이견을 조정하는 국회의장보다는 출신 정당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반영하는 의장이 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셈이다.

민주당 후보들은 국회의장의 '법률안 직권 상정'도 예고했다. 법률안 직권 상정은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의 경우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한 경우 중 최소 1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2014년 국회선진화법 개정 과정에서 직권 상정 요건이 엄격하게 제한됐다.

하지만 민주당 후보들은 의장의 가장 강력하면서도 최후 보루로 지켜야 할 직권 상정을 손쉽게 언급하고 있다.

통상 법안은 본회의 표결에 부치기 전에 소관 상임위와 법사위를 거쳐야 한다. 이후 여야 원내대표와 본회의 일정 및 안건을 조율한다.

반대로 이견의 클 경우 상임위 또는 법사위에 장기간 계류한다. 이럴 경우 의장이 직권 상정을 통해 법안 심사 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2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해병대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 상정을 두고 김진표 국회의장과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오른쪽),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가운데)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2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해병대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 상정을 두고 김진표 국회의장과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오른쪽),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가운데)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립 포기하면 꼭두각시에 불과

보다 못한 김진표 국회의장이 나서서 일침을 가했다. 그는 최근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쪽 당적을 계속 가지고 편파적인 행정과 편파적인 의장 역할을 하면 그 의장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조금 더 공부하고 우리 의회의 역사를 보면 그런 소리를 한 사람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법상 중립 의무를 부여하니까 그래도 조정력이 생기고 양쪽 얘기를 들어보고, 또 여러 가지 현안 별로 의회의 모든 기구를 통해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회의장 무당적은 영국 의회를 참고했다. 영국은 하원의장이 의장선출과 동시에 모든 당직을 사임한다. 하원의장은 비당파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하원을 대표하고 각종 권한을 행사한다.

토론에 참가하지 않고 가부동수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표결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초당적이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의장으로서 역할이 강조된 것이다. 동시에 소수 의견과 이해관계를 보호해야 할 책임도 진다.

국회의장이 정치적 중립을 포기하면 국회는 다수의 횡포에 노출된다. 다수결은 현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이다. 하지만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충분한 토론과 숙의가 필요하다. 국회의장이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수당 의견만 좇을 경우 상임위, 법사위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의미가 없어진다.

또 모든 의사를 다수결로 정한다면 소수당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수의 의견을 따르되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의장이 이런 태도를 가지지 않으면 국회는 다수당의 횡포로 운영되고, 의회 독재로 이어진다.

2002년 국회의장 당적 포기와 2012년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리는 국회법 개정은 여당과 야당의 타협으로 국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이 반영됐다.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들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