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이승만 반대론자들이 이승만을 공격하는 논리 중의 하나가 1919년 3월 3일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위임 통치 청원이다. 위임 통치란 패전국의 영토 또는 식민지를 병합하던 종래의 관행과는 달리, 해당 영토에 대한 병합을 금지한다는 전제 하에 국제연맹이 영토를 관리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이 제도는 당시 국제사회에 횡행하던 식민 제도 극복을 위해 창설된 것이다.
◆미국 자유통상과 칸트 영구평화론에 뿌리 둔 위임 통치 제도
위임 통치 제도는 미국의 자유통상 제도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뿌리를 대고 있다. 식민지의 단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식민지가 식민 모국의 착취로 인해 구매력을 잃기 때문에 식민 모국은 새 식민지를 끊임없이 찾는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식민 모국들이 새로운 식민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전쟁을 벌인다는 점이다.
이런 전쟁의 악순환을 끊고 지구촌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이 보유한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켜 자유통상을 하는 세계 질서를 뿌리내리자고 외친 인물이 윌슨 미국 대통령이었고, 이것이 위임 통치의 근본정신이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미국의 경험과 칸트의 논리를 통합한 내용이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하의 중립』이고, 이 논문의 지도 교수가 미국 대통령이 된 윌슨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정한경과 함께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 통치해 달라고 요청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분명히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에 두도록 청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한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 중립적 통상지역으로 변할 것이고, 극동에 하나의 완충국을 탄생시켜 동양에서 특정 국가(일본)의 확장을 방지하고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즉, 한국을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모든 나라가 자유롭게 통상하는 국제연맹 위임 통치 지역으로 만들면 모든 나라가 자유통상을 하여 이익을 볼 수 있고, 그 결과 일본이 식민지 획득을 위해 팽창하는 것을 막아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위임 통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신채호·이동휘
문제는 당시 상해에 집결한 한국의 지도자들이 위임 통치가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개신 유학자 출신의 신채호는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 놈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극언을 했다(이강훈,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서문당, 1999, 19~20쪽).
공산주의자 이동휘는 "이승만은 썩은 대가리, 자치운동이나 위임 통치를 원하는 외교가는 원치 않는다"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1920년 12월 8일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은 1921년 1월 1일부터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의 집무를 시작했다.
1월 5일 이승만 대통령과 모든 각원이 참석한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날 국무총리 이동휘는 "민족자결주의가 고창되던 때에 나온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과 정한경의 자치론은 외교상 실패이며, 한민족의 독립 정신을 현혹시킨 행동이다. 이로 인해 사회의 비난이 정부로 밀려들고 있으니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라면서 이승만을 공격했다. 자기 뜻이 수용되지 않자 이동휘는 1월 24일 임정 국무총리직에서 사퇴했다.
1921년 2월에는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과 학무총장 김규식이 위임 통치 청원을 비판하며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했다. 위임 통치 청원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한 사람은 김규식이다.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은 이승만‧정한경의 독단적 행위가 아니라, 안창호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논의를 거쳐 준비된 것이다. 또,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 자신도 거의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그런데도 김규식은 "'한국인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찌하여 위임 통치 청원자 이승만을 대통령에 임명했는가'라는 각국 인사들의 반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비웃음을 샀다"며 이승만의 위임 통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김규식의 이중적 태도는 자기 보호를 위한 보신성 자구책이었다(오영섭,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위임 통치 청원 논쟁」, 이주영 외 지음, 『이승만 연구의 흐름과 쟁점』,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 46쪽).
1921년 4월 17일 박용만·신채호 등은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하고 상해 임정을 부인했다. 4월 24일 북경 군사통일회 소속원 17명은 공동 명의로 상해 임정과 임시 의정원을 불승인하고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시책을 모두 무효화한다는 최후통첩을 상해로 보냈다. 이유는 "임정이 위임 통치 사건을 일으킨 이승만을 수령으로 삼았으니 존재 이유가 없으며, 임시 의정원은 위임 통치 사건의 주모자인 국적(國賊)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그 연루자 안창호를 노동국 총판으로 선임했으니, 이는 위임 통치 청원을 묵인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중국에서 문호개방정책을 통해 유럽 열강을 견제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저지해주기를 기대했다.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이 구상한 위임통치제도는 '통상의 자유'를 원리로 하는 세계적 통상망을 구축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
◆일본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단수 전략
이 제도 구축의 최대 장애물은 열강 간에 영토쟁탈전을 야기하고 있는 식민지 문제였다. 이 때문에 윌슨 대통령은 식민지 해방을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문호 개방 지역으로 만들어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승만·정한경이 준비한 위임통치안은 한국이 미국의 위임 통치 하에서 중립적 지위를 누리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다. 그동안 미국과의 자유통상을 통해 국부(國富)를 증대시켜 실력을 다진 후 국제정세 변화를 활용하여 완전 독립을 달성한다는 구상이었다.
비판자들은 청원서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독립보장'과 '중립화 구상' 구절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악질적인 매국노이자 국적(國賊)"이라고 이승만을 매도했다.
오늘날 국제질서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는 유엔, WTO(세계무역기구), FTA(자유무역지대)가 자유통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과 윌슨, 칸트가 오래 전부터 주장했던 제도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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