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오멜라스를 떠나는 전공의들

입력 2024-04-25 18:56:52 수정 2024-04-25 19:47:17

이화섭 사회부 기자
이화섭 사회부 기자

방탄소년단의 노래 '봄날' 뮤직비디오 1분 8초쯤에는 네온사인 간판 하나가 등장한다. 'Omelas', 그러니까 '오멜라스'라고 읽는 이 간판은 SF 작가 어슐러 르 귄의 소설집 '바람의 열두 방향' 속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들고 온 오브제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굉장히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오멜라스'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의 행복을 유지하는 방법은 열 살쯤 되는 어린이 한 명을 지목해 이 어린이에게 끝도 없는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이 어린이의 존재를 마을 사람들이 알고는 있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외면한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 주목했던 부분이 '희생양'이었다. '소수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다수의 행복은 옳은 것인가'라는 의문, 더 구체적으로는 '현대 선진국의 번영이 지구 반대편 어느 나라의 전쟁과 기아로 인해 지탱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의문에서 쓴 소설이라는 것이다.

두 달 이상 이어지고 있는 의료 공백 사태를 중계하다시피 취재하면서 기사 속 댓글들을 살펴보면 의사 욕이 그득했다. 그나마 요즘은 대통령 성토 글도 보이지만 초기에만 해도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면서 무너지는 상급종합병원의 진료 체계로 자신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나니까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게 상급종합병원의 진료 규모 유지를 위해 갈아 넣어지다시피 한 전공의들의 처지였다. 마치 오멜라스의 행복을 위해 고통받는 열 살 어린이처럼, 이들은 응급실에서 환자들의 발길질과 머리끄덩이 잡기를 견뎌야 했고, 병의 예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불법 녹취를 당하고, 월 300만~400만원을 받고 주 80~100시간 근무하며 피폐해져 갔다. "3, 4년 뒤에 전문의 자격을 따면 이 짓도 벗어나겠지" 생각했지만 결국 필수의료를 맡으면 전공의 시절보다 몸이 덜 갈려 나갈 뿐 앞서 말한 그 어느 것에서도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정부의 의대 증원과 의료 개혁에 대해 필수의료 부문에 종사하는 전공의들이 가장 반발이 심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당장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이 응급의학과 전공의다. 이들은 소위 '바이탈 뽕'이라 해서 사람을 살리는 진료과라는 자부심으로 필수의료과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차피 돈과 지위, 기득권을 위해 의사 되려고 한 것 아냐?" 혹은 "의사 되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라는 식으로 여론이 반응한다. 앞으로 자신들이 치료해야 할 환자일지도 모를 이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에 견딜 자신이 없어 전공의들은 병원을 나섰다. 예수가 이 광경을 보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실 거다. "평생 안 아플 자, 이들을 돌로 쳐라"고.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결말은 이렇다. 희생양의 존재를 알고 이들에 대해 연민과 번민을 느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희생양이었음을 깨닫고, 자신들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을 두고 전공의들은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분위기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듯, 대한민국 의료의 봄날은 그렇게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방탄소년단은 '봄날'에서 '어떤 어둠도 어떤 계절도 영원할 순 없으니까' 아침은 다시 온다고 했는데 얼마나 기다려야, 또 몇 밤을 더 새워야 봄날이 다시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