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하야하라” 외침 독재에 맞선 정의의 광장
3개 대학 데모대와 교수·시민…‘부정선거’ 시장·도지사 규탄
2·28 시작으로 4월 혁명까지…現 중앙로, 민주주의 산증인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1960년 4월 26일. 운명의 날이었습니다. 오전 10시 27분, 이승만 대통령의 갑작스런 성명에 국회의사당 안팎은 함성과 박수로 뒤덮혔습니다. 데모대는 일순간에 감격의 도가니로,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5만 여 군중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 시각 대구도 뜨거웠습니다. 오후 1시, 급히 만든 플래카드를 앞세워 경북대 교수단과 학생 200여 명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국민은 원한다'며 '즉시 하야'를 촉구했습니다. 오후 1시 40분, 교수단이 집결한 대구역 광장은 몰려든 시민들로 달아올랐습니다.
"…부산 정치파동, 4사5입 개헌 등 실정(失政)이 도를 넘더니 3·15 부정선거로 민주주의를 도살하고…." 선언문이 끝나자 중앙통(로)으로 질서정연한 데모가 시작됐습니다. 헌병은 길을 트고 연도에선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반월당네거리에 이르러 고병간 경북대 총장의 선창 아래 만세 삼창을 끝으로 해산하나 싶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대구대 교수단은 남문시장 쪽에서, 청구대는 서문로, 도청(현 경상감영공원)을 돌아 구름 인파를 몰고 왔습니다. 3개 대학 교수단과 대학생, 흥분에 휩싸인 중·고교생, 남녀노소 시민들…. 중앙통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기어코 넘어졌구나!" "정말 8·15 같은 기분이다!" 거리에서 다방에서 감격의 대화가 쏟아졌습니다.
물 끓는 듯한 흥분보다 경상도 특유의 깐깐한 노호(怒號), 희열과 환희로 뒤범벅이 된 중앙통을 지나 오후 3시 30분, 군중들이 시청을 포위했습니다. "이(종왕) 시장을 불러내라!" 시장은 간 데 없고 간부들마저 싹 자릴 비웠습니다. 폭동 직전, 사태를 간파한 건 경호를 지휘하던 윤춘근 계엄사무소장. 그는 이 시장을 찾아내 연단에 세우고는 부정선거에 공개 사과토록 했습니다.
이어 윤 소장은 "대구 학생들의 첫 번째 데모(2·28)가 없었던들 마산사건도, 서울사건도, 오늘의 이 승리도 없었을 것"이라며 열변을 토하자 박수가 터졌습니다. 도청에서도 그는 피신한 오임근 지사를 끝내 불러 세웠습니다. "도 행정 책임자로 부당한 상부 명령에 거역할 수 있는 용기 갖지 못해 부끄럽게…." 오 지사도, 이 시장도 사임을 약속하고 가까스로 봉변을 면했습니다.
오후 8시, 어둠이 내리자 지난날 억울하고 분한 마음들이 울컥했습니다. 몽둥이를 든 청소년들이 반공청년단장 신도환 씨 집 가재 도구를 불태우고, 자유당 간부 집을 부수고 다녔습니다. '중파'를 시작으로 남산·덕산·동산·대신·내당·역전 파출까지 "와장창" 돌이 날아들었습니다. "절대 파괴 행동은 삼가라!" 대학생들의 쉰 목소리가 밤이 저물도록 메아리쳤습니다.(매일신문 1960년 4월 27일 자)
"기막히게 긴 세월이었다." "꿈만 같이 너무 빨리 다가온 이 순간…." 이기붕·최인규·이강학·한희석 등 문고리 권력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 그러나 민심은 저토록 대통령을 향했습니다. 마지막 짐은 오롯이 대통령의 몫. 자유당 12년 독재 정권은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마침내 쓰레기 더미에서 민주화의 꽃을 피워냈습니다.
그 시작은 '대구 2·28'이었습니다. 그래서 4월 혁명으로 민권을 되찾기까지 중앙통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불의에 항거하던 거리이자 자유를, 정의를 외치던 '광장'이었습니다. 64년 전 오늘, 격동의 순간을 멈춰 세운 이 사진들은 역사의 산증인이자 세계기록유산. 두고 두고 내일을 비추는 빛나는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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