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7>봄꽃이란 밥상

입력 2024-03-29 10:30:00

혹한 이겨낸 제주도 수선화, 30년 숨겨져 있던 울산 동백, 화엄사 홍매화 절정 치달아
난초 꽃잎 닮은 대구 수목원 납매, 빨래터공원 치렁치렁 수양매, 앞산 현충로 벚꽃 어번 주 만개

꽃망울은 총알, 꽃잎은 칼 같다. 우리는 지금 자객처럼 나타난 봄꽃한테 포위되고 있다. 아름다움은 치명적이다. 절창의 밥상은 이 계절 꽃과 동행 중이다. 하여, 꽃향기 모드로 눈을 감는다. 난발하는 꽃망울을 화전(花煎)처럼 부쳐 놓는다. 절창의 '화반'(花飯)이다. 진주비빔밥 별칭도 화반 아닌가.

꽃망울은 총알, 꽃잎은 칼 같다. 우리는 지금 자객처럼 나타난 봄꽃한테 포위되고 있다. 아름다움은 치명적이다. 절창의 밥상은 이 계절 꽃과 동행 중이다. 사진은 대구수목원의 납매.
꽃망울은 총알, 꽃잎은 칼 같다. 우리는 지금 자객처럼 나타난 봄꽃한테 포위되고 있다. 아름다움은 치명적이다. 절창의 밥상은 이 계절 꽃과 동행 중이다. 사진은 대구수목원의 납매.

기자가 된 후 지금까지 봄꽃의 사정을 기록하며 '남도 봄꽃 삼만리'를 완성시키는 중이다. 삼국유사가 아니라 '화국유사'(花國遺事) 같은 것, '봄꽃의 계보, 화경삼매(花經三昧)'란 제목으로 책을 출간해보고 싶다.

갑자기 고인이 된 지역의 괴짜 글쟁이 한 명이 생각난다. 수필가 엄지호. 그는 경북도 공무원 시절 매년 매화, 개나리, 벚꽃 등의 개화일을 장부처럼 기록해나갔다. 그 열정을 가상히 생각한 도반 최석하 시인(고인)이 '희귀식물 엄지호'란 시집을 헌정한다.

◆봄꽃의 세대교체

우리 중 몇이나 봄꽃의 절정부를 친견할 수 있겠는가. 타이밍을 놓쳐 빙상의 일각만 볼뿐이다. 동백꽃, 복수초, 생강나무, 수선화, 고매,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벚꽃, 복숭아꽃, 사과꽃, 배꽃, 살구꽃, 다음 장에선 아까시나무와 밤꽃, 철쭉, 급기야 자귀나무에 깃털 같은 꽃이 피면 만산은 여름으로 접어든다.

단연코 봄소식 1번지는 제주도. 하이라이트는 한동안 유채꽃이었다. '제주도의 봄=유채꽃'이란 등식이 성립됐던 그 시절. 유수 일간지 봄의 전령사 메인 사진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라산 복수초와 호흡을 맞춘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광치기해변의 유채꽃에서 만발하는 관광객의 미소였다. 제주의 신혼부부도 '봄꽃'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유채꽃은 '전국구'가 된다. 포항 호미곶, 창녕 남지체육공원, 삼척 맹방유채마을, 부산 대저생태공원, 장흥 선학동 유채마을, 울산 슬도, 청산도, 부여 백마강변, 경주 첨성대, 금호강 하중도 등이다.

제주도 봄의 전령사도 세대교체 중이다. 수선화·동백·매화가 유채꽃을 '뒷방늙은이'로 밀어낸다. 유채가 밀려난 자리에 리조트, 펜션, 풀빌라, 전원주택, 게스트하우스, 카페, 미술관, 박물관 등 패셔너블한 건축물이 들어선다.

◆제주도 수선화의 호령

1840년 제주도로 유배온 추사 김정희를 8년 3개월간 고적한 맘을 추사체로 위무해준 꽃이 수선화다. 추사는 제주도에 와서 매화보다 수선화가 더 혹한에 맞선다는 걸 알게 된다. 이후 제주수선화는 추사가 죽은 이후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 잊혀진다. 그러다가 부활한다. 2010년 5월 개관된 김정희 유배지 내 추사관 때문이다. 대정읍은 졸지에 '제주수선화 1번지'로 등극한다. 정월이 되면 그 동네 돌담 아래 수선화가 등대처럼 빛난다. 제주수선화는 '금잔옥대'라 불리는 육지 수종보다 더 두껍다. 제주사람들은 '말마농꽃'이라 부른다. 빠르면 1월 1일 한림공원에서 10여만 그루가 만개된다.

◆동백꽃의 연대기

언젠가부터 제주도는 수선화에 이어 동백꽃 성지가 돼버렸다. 부산의 동백섬, 여수의 향일암과 오동도, 욕지도와 지심도, 거제도, 강진 백련사, 해남 대흥사, 고창 선운사, 그리고 한국 동백의 북방한계선인 서천군 마량포구 동백정까지, 육지의 동백은 제주도 동백이 넘겨다 보기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너무나 수북하고 광막한 탓이다. 그런데 2010년을 넘어서면서 육지의 동백꽃의 권위는 컬러풀 포토존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주도 동백이 다크호스로 대두한다. 육지의 동백이 '파워풀'하다면 제주도는 '컬러풀'하다.

얼추 15개의 핫플이 있다. 휴애리, 동백수목원, 동백포레스트, 동백마을, 동백군락지, 한라수목원, 동박낭, 카멜리아힐, 카페 마노르 블랑과 파더스가든 등이다. 극강의 포토존을 만끽하려면 1만3천 원의 입장료를 각오하고 남원읍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에 가면 된다. 설산의 한라산을 배경으로 핀 동백이 압권이다. 근처 남원읍 신흥리 동백마을에 가면 주민들이 운영하는 동백방앗간에서 동백기름을 살 수 있다. 11월부터 3월까지 꽃을 피우는 카멜리아힐에 가면 80여개국 500여 품종, 6천여 그루의 동백을 경청할 수 있다. 시크릿 동백길에 들면 하양, 노랑, 분홍, 빨강 동백꽃의 버라이어티를 촬영할 수 있다.

의외의 곳에 한국 최고의 동백이 있다. 울산시 울주군 목도(일명 춘도섬)에 가면 수고 6.6m, 몸통 둘레 3.1m, 폭 9.9m의 노거수형 동백이다. 1992년부터 30년간 출입금지가 됐고 지금은 해금됐다. 동백처럼 비빔밥 노포도 울산에 있다. 전주와 진주 비빔밥보다 더 오래 된 '함양집'이다.

동백꽃은 크게 애기동백‧토종동백‧겹동백으로 갈라진다. 애기동백은 유럽 동백이 토종과 섞이면서 태어난 것이다. 혼혈 동백, 그래서 더욱 하늘하늘, 육감적인 색감을 쏟아낸다. 빨강과 분홍 사이의 수많은 채도와 명도를 촘촘하게 보여준다. 질 때도 잎이 한 장씩 비처럼 흩날린다. 애기동백은 일명 '산다화'(山茶花)로 불린다. 제주도 4.3 관계자에게는 그 자태가 맘에 걸릴 것이다.

나머지 두 동백은 장미와 카네이션처럼 두툼하다. 너무나 깊은 빨강이다. 질 때도 참수 당하듯 화두(花頭)가 댕강 땅바닥으로 고꾸라진다. 허공에서 한 번 땅에서 한 번, 천지간에 두 번 꽃을 피워문다.

◆탐매(探梅)

수선화와 동백, 그리고 산수유 사이에 낮달처럼 걸려 있는 고매(古梅).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소시민에게는 되레 흐드러진 형용의 벚꽃이 더 만만하다.

매화도 진골과 성골이 있다. 광양 홍쌍리청매실농원의 푸짐한 매화는 연예인 같다. 진해를 선두로 전국 각 지자체가 영화관 팝콘처럼 튀겨내진 벚꽃의 행렬과 같은 레벨로 비교해서도 안 된다.

꾼들은 아티스트 같은 매화를 찾는다. 오지에 숨어 눈물처럼 한숨처럼 돋는 엄지손가락 끝마디만한 매화를 탐험한다. 그래서 '탐매'(探梅)는 고매(古梅)의 아호가 됐다. 연상 선비의 모습이다. 조선 한지와 달항아리에 스민 유백색이 얼비친다. 선비의 도포자락 같다. 조촐하고 고졸한 암향(暗香)이 일품이다. 퇴계 이황도 저승으로 가기 전 제자한테 애지중지하던 매분(梅盆)에 물을 주란 분부를 했다.

현재 한국 고매 중 스타급은 단연 양산 통도사 '자장매'와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 모두 홍매화로 불리지만 그 붉음이 너무나 깊고 짙어 '흑매'(黑梅)로 불리기도 한다. 최강 포토존으로 정평이 나버렸다. 자장매는 2월 중하순, 화엄매는 3월 중하순이 개화 적기다.

고매는 1월에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2월이 최적기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매년 2월 한국에서 가장 일찍 꽃을 피우는 매화 2인방은 순천 금둔사 금둔매와 자장매.

탐매 족보에 오른 고매를 열거해 본다. 선암사 선암매, 송광사 송광매, 금둔사 금둔매, 통도사 자장매, 남명 조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산청군 산천재 남명매, 화엄사 화엄매, 백양사 고불매, 강릉 오죽헌 율곡매, 안동하회마을 서애 유성룡 생가의 서애매(충효매), 창덕궁 만첩홍매, 김해건설공고 교정의 와룡매 등이다. 선암매, 고불매는 전남대 대명매·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마을 계당매‧소록도 수양매와 함께 '호남5매'로 불린다. 선암매는 금둔매, 송광매와 함께 '순천3매'로 불린다.

구례 화엄사 화엄매. 사진작가 배교석 제공
구례 화엄사 화엄매. 사진작가 배교석 제공

매화의 최대 포토존은 단연 화엄사 화엄매. 거의 '임영웅급'이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 절보다 꽃 때문에 방문하는 사람도 적잖다. 아무튼 그 미학 때문에 화엄매 사진공모전까지 론칭됐다. 워낙 많은 사진 동호인들이 동시에 문의 전화를 하는 바람에 요즘 홈페이지에 개화율을 공개하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적는 지난 21일 확인해 보니 개화율이 90%, 이번 주말이 극치의 자태를 보여줄 것 같다. 몇 번 화엄사를 찾았지만 아직 화엄매 정수리는 못 보고 있다. 내년에는 반드시 최강의 표정을 촬영하고 싶다.

대구 시내에도 매화 포인트가 몇 군데 있다. 2월이면 대구수목원에 가면 음력정월에 핀다고 하는 '납매'(臘梅)가 있다. 난초 꽃잎을 닮았다. 그 뒤를 잇는 매화를 보려면 대덕문화전당 길 맞은편으로 가면 된다. 매년 나와 수인사를 나누는 5그루의 수양매이다. 지척에 있는 대명동 빨래터공원 수양매는 분수의 물줄기 같은 수십 줄기의 꽃줄기를 치렁치렁 드리우고 있다. 그걸 본 사람들은 '대구에도 이런 매화가…' 라며 탄성을 자아낸다. 그리고 남평문씨 세거지도 형형색색의 매화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낙향한 문태갑 전 서울신문사장이 세거지에 심어놓은 매화인데 갈수록 극강의 포토존으로 치닫고 있다. 한강 정구를 기리는 성주 회연서원에 가면 신라 토우처럼 생긴 옴팡진 백매화의 율동을 만날 수 있다.

◆산수유마을

생강나무꽃과 구분하기 힘든 산수유꽃. 화엄매가 꽃망울을 맺기 시작하면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마을과 의성군 사곡면 산수유마을은 산언저리에 오종종 앉아 있는 마을 전체가 노랑빛의 무릉도원으로 변한다. 반곡마을에 가면 지리산의 설산을 머금고 있는 산수유를 만날 수 있고 가장 오래 된 산수유는 근처 계척마을, 현천마을에 가면 저수지에 비친 산수유를 볼 수 있다.

바야흐로 대구의 첫 벚꽃길이었던 앞산 현충로에도 벚꽃이 만개지경이다. 꽃을 읽어내고 받아내는 맘은 잠시 허기를 멀리 밀어낸다. 예전 유생처럼 욕기(浴沂‧유유자적)와 답청(踏靑‧청명에 교외를 산책)의 맘을 발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