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보수의 굽(屈)은 소나무

입력 2024-03-26 14:12:26 수정 2024-03-26 18:58:23

어려울때 보수 지킨 '찐 보수', 홀대해선 안돼
국민 눈높이도 좋지만 보수 간 벽 생겨서야…

5·18 민주화운동 폄훼 발언 등으로 논란을 빚어 국민의힘 4·10 총선 대구 중·남구 공천이 취소된 도태우 변호사가 탈당 후 무소속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17일 도 변호사 선거사무소 모습.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5·18 민주화운동 폄훼 발언 등으로 논란을 빚어 국민의힘 4·10 총선 대구 중·남구 공천이 취소된 도태우 변호사가 탈당 후 무소속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17일 도 변호사 선거사무소 모습.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임상준 서부지역취재본부장
임상준 서부지역취재본부장

인턴사원과의 출장길에서 김 과장은 뒷목을 잡았다. "저기 왜 'ㅅ(시옷), ㅁ(미음)'을 써 놨을까요?" 식당 입구(入口)라고 적힌 큰 간판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MZ세대이거니 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다고 김 과장은 말한다.

젊은 세대들이 보면 고리타분하게 보일 수 있어도 한자(漢字)는 한글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거나 덧대는 순기능을 한다. 식구(食口)만 봐도 '함께 먹는 입'이라는 해석이 들어 있다. 정치에 자주 언급되는 '친윤, 친명' 등의 '친할 친(親)'에는 '나무에 올라서서 자식이 오는 길에 다치지나 않을까' 살피는 애끓는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다.

막말 논란으로 받은 공천장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서 떠오르는 글자도 있다. 품격(品格)에는 입(口)을 세 개나 쌓아 놓았다. 군자(君子)를 파자하면 '입(口)'을 '다스리는(尹)' 사람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 말을 가려 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과거 잘못 한 말로 '공천을 뒤집는 모습'에선 '강물(川) 흐르듯' 하는 순리(順理)는 보이지 않는다. 출사한 후보를 굴복시킨 '휠' 굴(屈)이 연상된다. 굴자는 날 출(出)에 주검 시(尸)를 얹어 놓은 형상이다.

십 년도 더 지난 센 발언 탓에 공천장을 잃어버린 부산의 그 젊은 후보(윤석열 대통령 1호 참모)나 박근혜 전 대통령 변호인까지 지낸 대구의 변호사는 '말의 품격'을 따져 묻기보다 아파트 옥상(木)에라도 올라서(立) 살펴주고(見) 싶은 친한 마음(親)이 생긴다. 이들은 보수가 백척간두에 섰을 때 때로는 글로, 때로는 말로 보수를 지킨 굽은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는 '국민 눈높이'를 들이대며 소나무 밑동을 싹둑 잘랐다(尸). 공관위가 보기엔 굽은 소나무가 보수 꼴통, 막말하는 진부한 보수쯤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온갖 풍파를 견디며 보수의 시간을 열어 놓으니 손에 티끌 하나 묻히지 않은 이들이 톱자루를 마음대로 흔들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대구경북(TK)도 홀대받기는 마찬가지다. 보수의 아름드리 소나무지만 선거철만 되면 물갈이 1호로 거론되며 '보수 꼴통'으로 낙인찍힌다. '보수의 심장, 보수의 고향'이라는 번지르르한 간판만 주고 정작 대접은 홀대(忽待)다. 홀대는 마음(心)이 없다(勿)는 의미다.

'막말 논란'으로 부산 수영구 공천이 취소된 장예찬 전 국민의힘 청년최고위원이 18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시의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참고 있다. 장 전 청년최고위원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연합뉴스

TK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는 지지로 '보수의 낙동강 전선'을 사수해 왔다. 박근혜 정부 탄핵에 이은 문재인 정권 탄생 뒤 보수가 거의 침몰 직전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2018년 7회 지방선거에서 전국 광역지방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대구경북에서만 보수 시·도지사를 배출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전국 최고 득표율로 윤석열 정부를 낳았다. 비바람에도 꿋꿋한 굽은 소나무, 대구경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분명한 건 기초 없는 성(城)이 없고, 온고(溫故) 없는 지신(知新)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힘들고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도 보수의 가치를 하나하나 쌓아 올린 굽은 보수를 '홀대'하면 안 된다. 이제라도 '보수'를 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국민 눈높이도 좋고 보수의 확장성도 중요하지만 보수끼리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겨선 곤란하다. 배우지 않아 한자 읽기를 실수했던 인턴사원에게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김 과장이 한자를 가르쳐 주며, 더 소통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