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수묵화, 서양에서는 놀라워하죠"

입력 2024-02-03 17:30:00 수정 2024-02-04 19:27:50

2년간 미국·유럽 8개기관 순회전시 마친 수묵화가 박대성
"현대미술도 중요하지만 고유한 것도 발전시켜야"

한국 미술의 거장인 박대성 화백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해외 순회 기념전
한국 미술의 거장인 박대성 화백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해외 순회 기념전 '소산비경(小山秘境): Sublime Beauty of Sosan'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박대성 화백의 해외 순회 기념전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박대성 화백의 해외 순회 기념전 '소산비경(小山秘境): Sublime Beauty of Sosan'을 찾은 시민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가 일상으로 접하는 것(수묵화)을 그쪽(해외)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을 보는 것처럼 굉장히 놀라워한다는 인상을 가는 곳마다 받았어요. 우리가 수묵을 옛날 것이고 고리타분하다고 폄하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수묵화가 소산(小山) 박대성(79)은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8곳의 해외 기관에서 순회전시를 열었다. 독일과 카자흐스탄, 이탈리아 등 유럽의 한국문화원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건너간 전시는 로스앤젤레스 LA카운티미술관(LACMA)부터 하버드대 한국학센터, 다트머스대 후드미술관,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찰스왕센터 및 메리워싱턴대학까지 미국 동부와 서부를 아울렀다.

2년에 걸친 순회전은 미국 서부지역 최대 미술관인 LACMA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LACMA에서 처음 열린 한국 작가 초대전이었던 전시는 원래 정했던 일정보다 약 두 달간 연장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지난 2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막한 개인전 '소산비경'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순회전의 뜨거운 반응을 전하면서 동양화의 정신성이 미국과 유럽 관람객들의 마음을 건드린 것 같다고 말했다.

"동양화는 정신성이 첫째고 그다음에 조형으로 들어가지만, 서양화는 닮았나, 안닮았나를 먼저 보는 것 같아요. 저 사람들(미국과 유럽 관람객)은 제 작업을 보면 놀라서 넘어져요. (먹으로) 검은 걸 해놨는데 뭔가 느낌이 오니까요."

해외에서는 이제야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박대성은 오랫동안 조형 실험을 거듭하며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고 한국전쟁 당시 왼팔을 잃었지만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여덟차례 입선했고 1979년에는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전환점은 1994년 미국 뉴욕에 머물면서 찾아왔다. 전통의 범주 안에서 실력을 다지던 그는 당시 뉴욕에서 1년간 머물면서 현대미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수묵화의 현대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가 작품에 현대성을 부여하는 방법은 다양한 기법을 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번 전시에 나온 '현율'은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점의 부감 구도를 사용해 근경, 중경, 원경 같은 전통적인 동양화 구성을 벗어난 작품이다. 작가의 딸 박정연 가나아트 LA 대표는 "해외전시 때는 이와 유사한 구도의 작품이 전시됐다"며 "수묵에 대한 이질감을 없애 관객들이 가장 잘 받아들여 줬던 작품 중 하나"라고 전했다.

경주의 유적들을 그린 '신라몽유도'에는 각 유적이 비례가 맞지 않을 정도로 크게 강조돼 있고 경주 남산의 모습도 실제 모습과는 다르게 단순, 왜곡돼 표현된다.

'만월' 역시 구도가 파격적이다. 집 위에 떠 있는 달빛의 모습을 삼각형으로 표현한 작업으로, 동양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구도다.

눈 내린 풍경을 그린 그림에는 눈을 그리지 않았지만 설경이 펼쳐진다. 작가는 "안 그리고 그리는 것이 미술의 '술'(術)"이라면서 "많은 시련을 겪고 연습해 나온 것으로 눈을 안 그려도 눈이 그려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형 산수화 위주로 구성된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 풍경을 그린 2017년작 '삼릉비경'이다. 경주의 자택 정원 풍경을 그린 가로 8.3m, 세로 4.8 m 크기의 그림 속 달빛이 전시장을 비추는 듯한 느낌의 작품이다.

해외 순회전은 전시뿐 아니라 학술적인 작가 연구로도 이어져 미국의 4개 대학이 전시와 연계한 평론집 형식의 도록을 발간했다. 한국화 작가를 미술사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영문 연구서다.

작가는 그러나 한국화가 정작 한국에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연신 아쉬움을 드러냈다.

"현실적으로는 한국화라는 것 자체가 없어졌어요. 어느 대학에서도 유지가 안 되고 있어요. 교과서에도 동양화, 수묵화가 없어요. 그걸 이렇게 내팽개쳐야 하나요.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국화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요. 몇 달씩 전시가 연장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왜 그런지 잘 들여다봐야 해요. 현대미술도 중요하지만, 고유한 것은 그것대로 발전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선조들이 물려준 좋은 문화유산인데 국가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했으면 좋겠어요."

박대성 작가의 전시장에는 젊은 관객들도 많이 찾는다. 미술애호가로 유명한 방탄소년단(BTS)의 RM이 여러 차례 그의 전시장을 찾아 '인증사진'을 남기면서 'RM 미술관투어' 코스를 따라가는 관객들도 많다.

작가는 "RM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독일 전시 때는 (RM 영향으로) 파키스탄에서 온 관객도 만났다"고 전했다.

전시는 3월24일까지. 유료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