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정치인을 만나면 종종 "정치해야지"라는 말을 듣는 일이 있다. 그들은 마치 덕담인 것처럼 미소를 띠고 말하지만, 듣는 이에게는 악담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 상당수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고, 심지어는 혐오한다. 남에게 미움 살 일을 하라는 것인데 그 말이 덕담일 리가.
우리나라 국민의 정치 혐오는 그 수준이 심각하다.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국회의원 신뢰도는 바닥인 것이 확인된다.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신뢰 점수가 국회의원보다 높을 정도라면 알 만하지 않나. 정치 기사 댓글을 보면 정치인을 부모의 원수보다 더 끔찍한 존재쯤으로 여기는 듯하고, 꼴도 보기 싫다며 정치에 관심을 끊고 산다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최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국회의원 수 300명에서 250명으로 감축'을 정치개혁안으로 내놨다. 여론이 국회의원 수를 줄이길 원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여론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머릿수가 줄면 이들에게 들어가는 국민 세금이 절약될 것이고, 또 '일 안 하는 국회'에서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도 깔려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냥 '꼴 보기 싫다'라는 감정적 이유가 가장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회의원 수가 줄어드는 것이 국민에게 좋은 일인지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그토록 미움받는 국회의원이 되려고 줄을 선 이유가 뭘까. '특권'이라 불릴 만큼의 엄청난 권한 때문일 것이다. 2023년 국회의원의 수당은 연간 1억5천만원 수준이다. 지원 예산, 보좌 직원 인건비 등을 합하면 임기 4년 동안 의원 1인당 지원되는 세비가 34억원을 넘는다. 여기에 불체포 특권 등 200개에 달한다는 권한도 있다. 국회의 주요 기능이기도 한 법안을 만들고 예산을 편성하는 권한이 가장 큰 특권이다.
국회의원 수가 줄게 되면 이 같은 수많은 권한이 소수에게 집중된다. 물론 불체포 특권 등 일부 권한을 없애고, 세비를 줄이는 등 일부 권한은 축소시킬 수 있다. 그렇더라도 사회의 변화가 빨라지고 복잡해질수록 법 제정과 예산 편성의 영역은 확장될 수밖에 없는데, 국회의원 수가 줄어들면 1인당 권한은 더욱더 커지게 될 것이다. 머릿수가 적으면 담합도 쉬워진다.
대표성 문제도 있다. 지방 선거구의 경우 인구수로 인해 거대한 면적이 하나의 선거구로 묶여 있는 경우가 많다. 강원도 속초·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을 묶은 공룡 선거구는 무려 서울 면적의 8배다. 이토록 넓은 지역을 한 사람이 대표하는데 주민들의 목소리가 닿을 수나 있겠는가.
그래서 국회의원 수보다는 특권을 줄이는 방향이 설득력 있다. 먼저 세비를 삭감해야 한다. 국민소득 대비 세비는 OECD 36개 국가 중 3위로 최상위권인데 의회 효과성 평가는 뒤에서 두 번째, 꼴찌 수준이다. 불체포 특권을 포함해 각종 면책 권한 또한 줄여야 한다. '화끈하게' 깎고, '상당 부분' 내려놓아야 한다. 국민들이 원하는 건 국회가 '일하는 만큼만' 돈을 받고, '공헌한 만큼만' 누리는 것이다.
한 위원장은 앞서 '불체포 특권 포기' '금고형 이상 확정 시 재판 기간 세비 반납' '귀책사유 발생 시 보궐선거 무공천' 등의 정치개혁안도 내놨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이 들 것이다. 매번 선거철이면 나오는 정치개혁 카드다. 그럼에도 또 나왔다는 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 정도 수준으로 국민들이 개혁이라 느끼긴 어렵겠지만, 이것들이라도 지켜지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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