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이란 말이 있다. '뜻이 높고 매우 위대하다'란 뜻이다. '거룩'의 뜻풀이가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거룩은 고귀한 이들의 전유물 같다. 그런데 이는 거룩에 대한 오해이다. 거룩은 처음부터 거룩한 게 아니다. 세상살이의 비참으로부터 진짜 거룩이 탄생하는 까닭이다.
이 거룩론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 있다. '대구 사람' 전태일이다. 전태일, 흔히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비견된다. 노동 열사로도 불린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서울 평화시장 일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태일과 재단사 조직 삼동회는 이날 근로기준법을 화형에 처하기로 계획했다. 경비원과 형사들의 시선이 매서웠다. 점심시간이 되자 노동자들이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길에 웅성거리며 모였다. 근로기준법을 가슴에 품은 전태일이 평화시장 건물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몇 걸음이었을까, 전태일의 몸에 불이 붙는다. 전태일은 자신을 사르며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근로기준법을 소각한다.
이때 전태일의 나이 스물두 살. 평화시장 일대 봉제 공장의 노동 현실은 열악했다. 아니 끔찍했다. 어린 노동자들의 권리를 개선하기 위해 전태일은 동분서주한다. 뜻을 같이하는 재단사들과 삼동회를 조직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학습한다. 서울시청과 노동청을 상대로 노동 개선 진정서를 여러 번 제출한다.
그러나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노동청과 사법 당국은 전태일과 삼동회를 회유하거나 기만했다. 대중들의 무관심은 거대한 장벽이었다. 근로기준법은 단지 종이에 적힌 글에 불과했다. 전태일의 눈에 밟히는 이들이 있었다. 어린 여공들이다. 누구보다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을 사랑한 전태일이다. 여공들이 눈에 밟혔다. 그 어린 여공이 동생 같았고 예전의 자기 같았다.
전태일은 끝내 분신을 결행한다. 청옥학교 벗들에게는 진작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달라"는 서신 형식의 유서를 남긴다. 전태일은 자신을 태움으로써 세상을 밝힌다. 그 밝혀진 세상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조명된다. 노동자의 권리를 인간 본연의 권리로 불 밝힌 이가 바로 전태일이다.
그런데 전태일이 노동 열사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럴 이유가 있다. 전태일이 대구 사람이어서 그렇다. 대구 남산동에 전태일 생가가 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와 인접한 골목에 생가가 있다. 전태일이 서울로 올라가기 전 1962~1964년 가족과 함께 살던 곳이다.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 주최로 2020년 전태일 대구 생가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전태일 문패 달기' 행사였다. 오로지 시민들의 성금으로 매입한 생가에서 문패 달기 행사까지 열렸으니 반가움이 컸다.
전태일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의 굴레에 갇힌다. 굶주림은 예사였다. 어린 나이에 동생과 함께 동대문시장에서 삼발이 장사를 했다. 삼발이를 팔지 못한 소년은 구두통을 들고 남대문시장을 헤맨다. 부산 영도로 가출한다. 소년은 늘 허기졌다. 부산 영도에는 소년이 먹을 게 없었다. 가족은 언제나 그리웠다. 1년을 가족과 헤어진 전태일이 대구에서 가족을 만난다. 대구 외할머니로부터 가족의 근황을 듣게 되어서다. 그리고 이 남산동 집에서 전태일은 가장 행복한 추억을 쌓는다.
1963년 5월의 일이다. 당시 대구 명덕국민학교 경계 내에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있었다. 중학교 과정의 학교이다. 남녀공학 야간학교이다. 어느 날 큰집을 다녀온 어머니가 청옥학교 입학 이야기를 꺼낸다. 전태일이 청옥학교에 입학한다. 전태일이 이 학교 학생으로 있었던 시간은 채 1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전태일은 자신의 수기에서 이때를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상한다. 사람은 벗과 사귀고 배울 때 행복을 느낀다. 전태일도 그랬다.
전태일 대구 생가를 기념관으로 건립한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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