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미필자·실업자 모아 영주 막사 생활…삽·곡괭이 들고 뙤약볕 피땀으로 일군 작품들
1962년 4월 10일, 오늘은 국토건설단 편입식이 열린 날. 대구종합운동장(현 시민운동장)에 장정 1천4백98명이 소집됐습니다. 이들은 태백산지구 국토개발을 위해 경북선 연장구간 노반 공사에 투입될 요원들입니다.
재건의 깃발이 드높던 1962년 일꾼이 부족하자 '혁명정부'는 궁리 끝에 군 미필자, 실업자를 끌어모아 그해 2월 국토건설단을 창단했습니다. "12개월만 고생하면 병력 기피 빨간 딱지를 떼 주겠다". 창단 첫해 전국에서 무려 2만여 명이 몰렸습니다. 농사꾼, 회사원, 교사, 약사, 고등고시 1차 합격자까지. 부양 가족이 딸린 대졸 아빠도 수두룩했습니다.
단화, 모자, 푸른 단복으로 갈아 입은 모습은 영락없이 늘그막에 군대 끌려가는 신병 신세였습니다. 아빠를 보내는 꼬마들의 행렬, 꼬마를 안고 볼을 부비는 아빠, 짧은 이별에도 울먹이는 연인들, 그리고 하얀 저고리의 어머니, 어머니들….
환송식이 끝나고 건설단은 2군 군악대의 노란샤스 입은 사나이, 아리랑 변주곡을 들으며 특별열차를 타고 영주로 떠났습니다.(1962년 4월 11일자 매일신문)
경북선 연장 구간((점촌~예천~영주·58.6km) 노반공사는 국토건설단 제5지단이 도맡았습니다. 5지단 4천5백73명 중 대구경북 출신자는 3천6백15명. 관리자(기간요원)는 모두 예비역 장교. 건설단은 군법이 적용되는 군대 조직으로 편성됐습니다.
영주에서 막사 생활을 한지 수 개월째. 태백산지구 광산 물동량을 처리할 새 철도기지(현 영주역 주변) 노반 공사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이 일대는 서천이 수시로 범람하던 무논 들판. 1961년 7월 대 홍수 땐 통째로 물바다가 됐던 곳입니다.
개인 장비는 1인 당 삽 한 자루, 3명 당 곡괭이 하나에 질통 1개. 이 장비로 산을 밀고 언덕을 깍아 리어커로, 광차로 흙을 실어 저지대 노반을 다졌습니다. "우리는 개척자다" 5지단 슬로건 그대로 건설단은 산을 옮겨 철도기지를 건설하는 개척자였습니다.
"너무 고되서 말할 힘도 없다. 불도저가 할 일을 삽질로 하고 있으니 병이 날 정도다. 뙤약볕에, 힘든 노동에 단원들은 모두 깜둥이, 홀죽이로 변했다….'(1962년 7월 8일자 매일신문).
식사 시간 만큼은 코리언 타임이 없었습니다. 밥은 늘 부족해 삽질 몇 번이면 또 그놈의 허기가 찾아와 배고프다 했습니다. 외출이 허용된 주말이면 너나 없이 노임을 쪼개 빵과 술로 배를 채웠습니다. 공사장 인근에 새 기와집으로 문을 연 음식점은 6개월 만에 본전을 다 뽑았습니다. 막사는 금녀의 집. 수시로 옷이 헤져 밤마다 바느질로 바빴습니다. 유독 심한 가뭄에 농촌 출신 단원들은 농삿일 걱정에 잠을 설쳤습니다.
그러던 10월 어느날 건설단 해체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간 문제도 많았던 터. 무엇보다 단원 대부분이 허약 체질에 고된 일로 환자(늑막염)가 속출했습니다. 의사가 진단을 내리고 쉬게 해도 현장에선 거절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현역병에 준하는 제약, 군법 적용, 장비 부족, 실적 저조, 부실한 급식과 겨울철 난방 걱정….(1962년 11월 14일자 매일신문)
11월 30일, 국토건설단은 소집 7개월 만에 전격 해체됐습니다. 12월 19일 국토건설단 설치법도 폐지됐습니다. 이듬해부터 공사는 문경, 예천, 영주지역 주민을 동원해 취로사업으로 이어가 마침내 1966년 1월 27일 점촌~예천 구간이, 그해 11월 9일 예천~영주 구간이 각각 개통됐습니다.
남강댐·섬진강댐 진입로, 양구~화천 간선도로, 정선선 철도, 울산공단 간선도로. 이 모두 국토건설단이 피땀으로 일군 작품들입니다. 의도와 달리 군 미필자와 불량배 등을 강제 징집하듯 끌고가 말도 많았지만 국토건설단은 그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피땀으로 뒷받침한 훌륭한 일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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