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경 교수의 수도원 탐방기] 논베르크 수녀원(Nonnberg Abbey)

입력 2023-11-24 14:30:00 수정 2023-11-24 19:06:31

평화 갈구하던 숨은 터…'사운드 오브 뮤직' 통해 알려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품은 신비의 산인 페스퉁스베르크 산 꼭대기엔 호엔 잘츠부르크 성이 그 아래에는 궁전이 있고, 산기슭 곳곳에 수도원과 유적들이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품은 신비의 산인 페스퉁스베르크 산 꼭대기엔 호엔 잘츠부르크 성이 그 아래에는 궁전이 있고, 산기슭 곳곳에 수도원과 유적들이 있다.

스위스를 떠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향했다. 옆 동네를 지나듯 스위스 국경을 넘었다. 성 요한 수녀원이 있는 뮈스테어(Müstair)는 국경 지역, 한때 치열한 독립전쟁의 아픔이 있었지만, 지금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세 국경을 넘나들며 우리는 평화보다 아름다운 가치가 없음을 경험했다. 평화가 마음에 자리를 잡자, 평화를 갈구했던 옛 히브리인들의 소리가 입가에 맴돌았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칠 것이다. …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이사야 35장)

드디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서쪽엔 웅장한 알프스, 동쪽엔 호엔 잘츠부르크 성, 그 아래 당당히 서 있는 호크부르크 궁전, 잘츠부르크 대성당. 역시 잘츠부르크는 "북쪽의 로마"였다.

그곳엔 웅장한 교회가 즐비했고, 한때 가톨릭 세계에서는 로마의 바티칸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종교도시였다. 16세기 라이테나우의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는 이탈리아 예술과 건축에 매료되어 잘츠부르크를 아름다운 건축물의 도시로 만들었다. 그가 잘츠부르크를 바로크 양식의 보석으로 만들었고, 1997년 잘츠부르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논베르크 수녀원은 호엔 잘츠부르크 북쪽 언덕 기슭에 숨어 있었다.
논베르크 수녀원은 호엔 잘츠부르크 북쪽 언덕 기슭에 숨어 있었다.

◆잘츠부르크, "북쪽의 로마"

잠시 잘츠부르크의 전통과 미에 취한 후, 잘자흐강을 건너 논베르크 수녀원으로 향했다. 앞에는 병풍처럼 둘러선 페스퉁스베르크산이 잘츠부르크를 동쪽에서 남북으로 감싸고 있었다. 페스퉁스베르크 산 꼭대기엔 호엔 잘츠부르크 성이 그 아래에는 궁전이 있고, 산기슭 곳곳에 수도원과 유적들이 있다.

페스퉁스베르크 산은 잘츠부르크를 품은 신비의 산이었다. 우리가 찾는 논베르크 수녀원은 호엔 잘츠부르크 북쪽 언덕 기슭에 숨어 있었다. 페스퉁스베르크 산 북쪽에서 논베르크 수녀원을 향해 걸었다. 수녀원은 호허 헤그를 통해, 카이가세에서 논베르슈티에쥬 계단을 거쳐, 논탈에서 좁은 골목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다.

어느 길이든 쉬운 길은 없다. 수녀원 가는 길도 그랬다. 길은 좁고, 가파르고, 계단은 무릎을 불편하게 했다. 논베르크 수녀들은 일평생 이 길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13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길은 여여했다. 논베르크 수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이들은 이 길을 걸으면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이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는 시편의 구절을 되뇌이며 걸었을 것이다.

이 노래는 마음이 정직하고, 가난하기를 소망하는 자들이 부른 노래다. 논베르크 수녀원의 수녀들도 이 길을 걸으며 더 정직하고 더 마음이 가난해지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논베르크 첫 수녀원장인 성 에렌트루디스의 무덤은 성모 마리아 교회 지하실에 있다.
논베르크 첫 수녀원장인 성 에렌트루디스의 무덤은 성모 마리아 교회 지하실에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배경

수녀원의 역사는 깊었다. 논베르크 수녀원은 잘츠부르크 주교 성 루퍼트(Rupert)가 712/715년 경에 건설했다.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된 수녀원이다. 첫 수녀원장은 성 에렌트루디스(Erentruids)였고, 그녀의 헌신적인 삶과 미담이 수녀원 역사에 깃들어 있다. 에렌트루디스는 가난하고 병든 자의 어머니였다.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바이에른 공작과 하인리히 2세도 중병에 걸렸을 때 그녀의 도움으로 회복되었다. 그 후, 이들은 수도원 건축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녀는 성자로 숭배되고, 1624년 잘츠부르크 국가의 어머니로 선정되었다. 지금도 그녀의 무덤이 성모 마리아 교회 지하실에 있다.

1965년에 나온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논베르크 수녀원을 세상에 알렸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에 각인시켰다. 이 영화는 실제 논베르크 수녀원과 연관이 있는 폰 트랩 가족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마리아 라이너(마리아 오귀스트 쿠체, Maria Augusta Kutschera)는 논베르크 수녀원의 수녀는 아니었지만 수련생이었다.

영화에서 마리아는 수녀원에서 허락 없이 노래를 부른다. 수도원 규칙을 깬 것이었지만 수녀원장은 그녀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그 마리아가 어느 가정교사도 돌볼 수 없었던 해군 대령 게오르그 폰 트랩의 일곱 자녀를 교육시켰다. 마리아의 창의 교육은 '다름'과 '의외성'을 인정해 주었던 논베르크 수녀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논베르크 수녀원 팔각기둥엔 성모 마리아와 아들, 성 루퍼트, 성 에렌트루디스 등이 조각되어 있다.
논베르크 수녀원 팔각기둥엔 성모 마리아와 아들, 성 루퍼트, 성 에렌트루디스 등이 조각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교회

논베르크 수녀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성모 마리아 교회다. 수도원 교회인 마리아 히멜파트(Maria Himmelfahrt)는 잘츠부르크에서 두 번째 오래된 교회로, 거룩한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교회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건물은 1423년 화재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후 1464년에서 1509년사이 세 개의 본당이 있는 후기 고딕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서쪽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탑은 12세기 초 건물이고, 바로크 양식이다. 교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합창단과 프레스코화, 문 옆의 팔각형 기둥에 있는 나무 조각상이다. 여기에는 황제 하인리히 2세, 성모 마리아와 아들, 성 루퍼트, 성 에렌트루디스 등이 조각되어 있다. 논베르크 수녀원의 마리아 교회는 논베르크 수녀원의 역사와 전통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논베르크 수녀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성모 마리아 교회.
논베르크 수녀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성모 마리아 교회.

논베르크 수녀원은 아침이다. 수녀들은 성무일도에 따라 하루를 시작한다. 이들도 베네딕트의 가르침에 따라 아침에는 시편 66편을 후렴 없이 외우고, 찬미의 노래로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논베르크 수녀원의 백미는 아침에 울려 퍼지는 그레고리오 성가다. 매일 아침 6시 45분에 아름다운 찬미로 도시의 아침을 깨운다.

신비롭게도 노래 소리만 들릴 뿐 노래하는 수녀들은 보이지 않는다. 수녀들은 그저 고딕 양식의 창문 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래한다. 순례자들은 창문 뒤의 그림자를 통해 그들을 볼 수 있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눈치챌 뿐이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얼마나 신비로운 노래이길래 그들은 세상이 볼 수 없는 그곳에서 노래할까.

그레고리오 성가는 교회의 신성한 음악이요 중세 음악의 원천이다. 그레고리오 성가에는 선율을 받쳐주는 화성과 반주가 없다. 단지 하나의 소리로 주님을 찬양한다. 논베르크 수녀원의 수녀들은 우리 모두가 그 하나의 소리를 들으며 우리 마음을 하늘로 향하길 소망하는 것 같았다.

논베르크수녀원은 들어갈 때도 나갈 때도 공동묘지를 지나야 한다. 공동묘지는 수도원 교회 입구와 곧장 연결되어 있다.
논베르크수녀원은 들어갈 때도 나갈 때도 공동묘지를 지나야 한다. 공동묘지는 수도원 교회 입구와 곧장 연결되어 있다.

◆네 죽음을 생각하라

한편, 수녀원은 들어갈 때도 나갈 때도 공동묘지를 지나야 한다. 공동묘지는 수도원 교회 입구와 곧장 연결되어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묘지 가운데 하나이다. 잘츠부르크에 또 다른 유명한 공동묘지는 성 베드로 수도원 묘지이다. 그곳에는 모차르트의 친척과 작곡가 하이든의 무덤이 있다. 공동묘지에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은 잘츠부르크가 유일할 것이다.

나는 수녀원을 나서면서 한참 동안 공동묘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덤 하나하나를 유심히 봤다. 그 무덤이 나를 향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네 죽음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트라피스트 수도승은 아니라 할지라도 중세의 어느 수도승들은 서로에게 "죽음을 생각하라, 사랑하는 형제여"라고 인사했다. 논베르크 수녀원은 우리 인생의 시작과 끝을 끊임없이 되새겨 주고 있었다.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논베르크수녀원은 들어갈 때도 나갈 때도 공동묘지를 지나야 한다. 공동묘지는 수도원 교회 입구와 곧장 연결되어 있다.
논베르크수녀원은 들어갈 때도 나갈 때도 공동묘지를 지나야 한다. 공동묘지는 수도원 교회 입구와 곧장 연결되어 있다.

잘츠부르크의 명사 모차르트도 누구보다 '죽음'을 깊이 묵상한 사람이다. 그는 어린 시절 성 베드로 수도원 공동묘지를 수없이 오갔을 것이다. 그는 하늘의 소리를 들으며 죽음의 의미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산 사람이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곡이 미완성으로 남은 "레퀴엠"이 아닌가.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곡이다. "레퀴엠은 '위대함의 죽음', '예술의 죽음', '인간 정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1787년 모차르트는 그의 아버지께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낄 때 그것이 우리 존재의 진정한 목적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저는 죽음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의 문을 향한 열쇠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 기회를 자유롭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비록 아직 젊지만 저는 내일 제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잠을 청한 적이 없습니다."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