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엽 문화경영 컨설턴트
1637년 3월 6일은 오페라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이날 대중을 위한 최초의 오페라극장인 '산 카시아노 극장'이 베네치아에서 문을 연 것이다. 이 극장의 개관으로 오페라는 특정 계층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즐기는 여흥이 됐으며, 유료 관객을 받을 수 있게 된 오페라극장은 시즌별로 미리 작품을 기획하고 관련한 투자를 할 수 있게 됐었다. '산 카시아노 극장'의 개관에 이어 베네치아에 유사한 극장이 여러 개 생겨났는데, 인근 교회의 이름을 딴 '지오바니 파올로 극장(1638년)'과 '산 모이세 극장(1640년)', 그리고 '노비시모 극장(1640년)' 등이다. 1700년까지 베네치아에서만 최소 15개의 대중 오페라극장이 생겨났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오페라 초기의 궁정에서 열렸던 공연은 궁정이 주관했기에 많은 관객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상업적으로 운영했던 베네치아의 오페라극장은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좌석 수를 늘리고, 어느 위치에서나 관객들이 공연을 잘 볼 수 있도록 시각적인 조건을 개선해야 했었다. 동시에 상류층은 독립적이고 사적인 공간을 요구해,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극장은 소위 '박스'로 불리는 칸막이를 만들었다. 이런 박스 안에는 안락한 소파, 고급 휘장, 값비싼 물품 등으로 치장됐으며, 카드놀이용 테이블은 필수였다. 박스 관객들은 공연 도중에 대화하거나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셨으며, 심지어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카드놀이를 했다. 또 박스 안은 어두웠기에 부적절한 행위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페라 작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멋진 기교나 극적인 상황에서는 열광했다.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이 도시의 가장 중심부에, 심지어 교회보다 더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던 이유는 오페라의 예술성이 높이 평가돼서가 아니라, 극장은 여흥의 장소였기에 누구나 접근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820년대까지 오페라극장의 넓은 로비는 카지노 게임을 위해 사용되거나 파티, 무도회, 그리고 연회가 열리는 장소였으며, 넓은 계단은 파티에 지친 몸을 쉬게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따라서 19세기 초 상류층은 여흥을 위해 매주 4, 5번 정도 오페라극장에 갔다고 한다. 당시 어떤 극장의 입장권은 두 종류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극장 입구를 통과해 로비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연장에 입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공연을 관람하고 싶었다면 두 가지 입장권을 다 사야 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극장이라 할 수 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동안, 이 극장의 로비는 손님으로 북적이는 카지노였다고 한다. 유명 소설인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셀리는, 1840년에 이 극장을 방문해서 실망하고서는, "라 스칼라는 밀라노의 모든 부류를 위한 모두의 응접실일 뿐만 아니라, 말 거래에서부터 주식 거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거래가 이 구덩이 안에서 이루어진다"라고 했다. 최근에 라 스칼라 극장은 또 다른 용도로 쓰였는데, 2018-19 시즌 FIFA 시상식이 여기서 열린 것이다. 2019년 9월 23일에 FIFA는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에서 리오넬 메시에게 '올해의 남자 선수상'을 줬다.
이미 몇십 년 전부터 많은 오페라극장이 오페라 공연으로만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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