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우리들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주말을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와 문자다. 각종 쇼핑 사이트가 쏟아내는 광고는 물론이고 대출 권유와 통신사 휴대전화 교체, 그리고 여론조사를 빙자해 걸려오는 전화가 그것이다.
'그들은 사채업자들보다도 더 집요하다.'
휴대전화 수신 거부 설정을 하더라도 걸려오는 모든 낯선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없고, 수신 설정하는 것도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수신 거부'보다는 아예 자신의 휴대전화에 등록하지 않은 전화는 받지 않는 사람도 꽤 많다.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하다 못해 충만한(?) 우리나라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교체하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 그리고 지방 선거 등이 거의 매년 실시되는 '정치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누가 국회의원이 되느냐, 혹은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는 등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무당층'이라도 시시각각 '어느 당을 지지하는가?' '대통령은 잘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강요당하고 있다.
여론조사가 정확한 여론을 묻거나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특정 정당을 지지하도록 유도하는 도구로 악용되고 개인의 정치 성향을 파악하는 '불순한' 조사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를 통한 정치 성향 강요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지난해 말까지 중앙선관위 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등록된 국내 여론조사 기관은 91개. 최악의 경우 모든 여론조사 기관이 같은 시기에 온 국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에 나서면 온 국민이 하루에 최소한 몇 차례씩 응답을 강요당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선관위는 여론조사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고 기준에 맞지 않는 여론조사 결과는 공표하거나 인용할 수도 없도록 한다. 문제는 여론조사 '응답률'에 대한 기준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 1~3%에 불과한 응답률을 보인 여론조사도 버젓이 선관위에 등록돼 여론으로 발표되고 있다는 점이다.
선관위는 지난해 7월 난립한 여론조사 기관의 폐해를 해소한다며 여론조사 기관 등록에 대한 기준을 강화했지만 낮은 응답률에 대한 규제나 제도 개선은 전혀 없었다.
지난 22일 한국갤럽 등 34개 국내 여론조사 기관이 가입돼 있는 '한국조사협회'(KORA)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실시하는 정치·선거 관련 여론조사에서 자동응답서비스(ARS) 방식을 없애기로 결의한 것은 잘한 일이다. 조사원이 직접 질문하는 전화면접조사가 아닌 ARS 방식은 전화면접조사의 10% 수준으로 응답률이 떨어지는 데다 응답자가 의도적으로 지역과 연령 등 신상 정보를 속이는 경우가 많아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협회는 휴대전화 가상번호조사 응답률도 10% 이상이 돼야 공표할 수 있도록 응답률 기준을 상향했다.
그러나 이런 여론조사 방식에 동의하지 않은 여론조사 기관이 전체 조사 기관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어 지금까지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또한 응답률 10%를 충족한 조사라고 해서 그 여론조사를 정말로 국민 여론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ARS 여론조사 응답률이 1~5% 내외에 불과하지만 전화면접조사 응답률도 10%를 조금 상회할 뿐이다. 응답률은 접촉한 응답 적격 대상 중에서 응답이 완료된 비율이다. 국제기준 응답률은 응답률과 크게 다르다. 선관위는 응답률에 접촉률을 곱하면 '국제기준 응답률'이 된다고 밝혔다. 추출된 응답 대상 중에서 결번과 팩스 등의 부적격 대상을 제외한 적격 응답자에게 접촉한 비율이 접촉률이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10월 4주 정당 지지도 조사 응답률은 13.6%였다. 그런데 접촉률은 39.1%로 국제기준 응답률을 계산하면 불과 5.31%에 불과하다.
김어준 씨의 '여론조사 꽃'이 등록한 제58차 정당 지지도 자체 조사(10월 21일) 응답률은 2.3%로, 접촉률(29.0%)을 곱한 국제기준 응답률은 0.67%.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수준의 여론조사가 여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여론조사는 문항 구성에서부터 편향된 질문을 하는 등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늘 제기되고 있는 등 여론조사가 오히려 '밴드왜건효과'를 유발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것이 부지기수다.
차제에 총선 민심을 왜곡하고 정치 혐오를 가중시키는 중구난방 여론조사를 규제하는 것이야말로 민심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투표에 반영하는 지름길이다. 여론조사를 빙자한 무분별한 여론조사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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