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이건희의 발자국

입력 2023-10-26 20:00:21

최경철 논설위원
최경철 논설위원

삼성그룹에 들어간 기자의 친구들은 한눈에 봐도 고생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 실험적인 제도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7.4제'였다.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것으로 삼성맨들은 새벽 별을 보면서 집을 나서야 했다. 10년 가까이 시행하다가 2002년 폐지되기는 했지만 재계에서는 이를 근무 혁명이라고 불렀다.

7.4제 등 우리나라 경제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파격 행보를 보였던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별세한 지 지난 25일로 3년이 됐다. 이날 경기도 수원 선영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유족 및 계열사 사장단이 참석한 가운데 3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올해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로 상징되는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 30주년이기도 해 경제계에서는 추모 분위기와 함께 이 선대 회장의 리더십 재조명 움직임도 확산하고 있다.

이 선대 회장은 신경영 선언을 통해 양적 성장에 머물러 있던 삼성과 한국 경제 전체에 강력한 경고를 보내며 고부가가치 제품을 향한 질적 성장으로의 대변신을 요구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 1등,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수준에만 머무르지 말고 확실한 브랜드를 가진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선지자적 관점을 내세웠고 삼성이 앞장서 이를 성취해 냈다.

기업 경영자든, 정치인이든 변화와 혁신을 주문하는 선언적 총론은 쉽게 내놓지만 경영 현장에 실제 적용되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이 선대 회장은 모험적 시도를 불사하면서 신경영 선언을 구체화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특정 라인에 불량품이 생기면 그 라인을 멈추게 만드는 '라인 스톱 제도' 등을 도입해 생산관리 체제를 재구축하고 순혈주의를 과감히 탈피, 글로벌 인재 도입 등을 통한 혁신적 인사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고 휴대전화 신화까지 써내려 가면서 명실상부한 초일류 기업 반열에 오른 삼성은 이병철 창업주 공로도 크지만 이 선대 회장의 개척자적 기업가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위상 실현이 가능했다. 안방에서만 호령하는 기업들, 골목상권까지 넘보는 대기업들이 적잖은 요즘, 세계 초일류를 지향했던 이 선대 회장의 발자국이 더욱 값지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