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용된 권리, 악성민원] '무죄' 집행유예' 솜방망이 처벌…피해자 고통 외면

입력 2023-10-22 16:26:58 수정 2023-10-22 20:56:25

판결문으로 본 악성 민원 실태
22건 사건 분석한 결과 집유 60%
무죄 사건도 3건이나…민원인 권리 우선

대구법원·검찰청 일대 전경. 매일신문DB
대구법원·검찰청 일대 전경. 매일신문DB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도 하는 악성 민원은 습관적, 반복적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문제는 악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할 법적 처벌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법원이 사실상 악성 민원인의 손을 들어주는 사이 공무원이 겪는 피해는 회복되지 않고 재발도 거듭되고 있다.

매일신문은 2021년 9월부터 올해 9월까지 2년 동안 민원 처리에 불만을 품고 공무원에게 위해를 가한 사건 22건을 분석했다. 1심 기준 대구지법과 대구지법 서부지원에서 처리한 확정 판결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기소된 혐의는 공무집행방해가 17건으로 가장 많았고 상해 2건, 특수공무집행방해 1건, 폭행 1건,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보복협박 등) 1건 등이었다. 선고형은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22건 가운데 14건(63.63%)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벌금형은 2건이었고 징역형은 3건에 그쳤다. 무죄도 3건이나 됐다.

◆만연한 폭력에 노출된 행정복지센터

사건이 가장 많이 벌어진 곳은 행정복지센터였다. 22건 중 10건이 행정복지센터에서 막무가내로 떼를 쓰다 폭행하는 유형이었다. 2021년 1~2월 대구 한 행정복지센터에서 민원인이 "휴대폰, 도시가스 요금을 지원해달라"며 "민원인이 굶어 죽는데 공무원이 아무것도 안 주냐, 동사무소를 폭파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된 민원인은 며칠 뒤 다시 행정복지센터를 찾아가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린다"고 협박했다. 이 민원인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보복협박 등)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지자체의 행정처분에 앙심을 품고 악성 민원인으로 돌변하는 사례도 많았다. 2021년 9월 대구 중구청으로부터 불법 건축물 공사에 대한 원상회복 명령을 받은 민원인이 구청에 찾아가 공무원들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기며 폭행한 사건이 빚어졌다.

그해 10월 공무원이 현장을 방문해 재차 경고하자 이에 흥분하며 공무원을 또다시 폭행한 혐의도 받고 있다. 법원은 피고인이 고령이고 처벌 전력이 없는 점을 고려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021년 8월 고령군청에선 쓰레기 불법투기로 과태료를 부과받은 것에 대해 항의하며 소란을 피우던 민원인이 형사 처벌을 받았다. 법원은 피해 공무원이 피고인의 선처를 탄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갖가지 사유로 감형해주는 법원

악성 민원 테러는 한 사람이 계속하는 경향도 보였다. 2021년 7월 대구 한 구청에서 청원 경찰과 공무원에게 욕설하고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민원인은 2008년, 2009년, 2015년, 2017년에도 같은 구청에서 난동을 피우다 각각 벌금 100만원,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 징역 1년, 징역 10개월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었다.

반복되는 악성 민원에도 법원의 온정주의적 판결은 문제로 꼽혔다. 지난 2020년 4월 술에 취한 민원인이 행정복지센터를 찾아가 종이컵을 주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욕설은 물론 의자를 차서 넘어뜨리고 사탕을 던지며 직원들을 폭행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을 자백하며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점, 피고인이 행사한 폭력의 정도가 비교적 중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021년 7월 대구 한 지구대에서 경찰을 폭행하며 난동을 피운 민원인에게 법원은 피고인이 다소 우발적으로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기도 했다.

◆악성 민원도 시민으로서 권리?

무죄 사건이 많은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공무집행방해 사건에서 법원은 범죄 구성요건을 더욱 엄격하게 판단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겪는 피해보다는 민원인의 권리가 우선됐다.

2020년 9월 도로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공무원을 폭행한 민원인도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였다. 노상에 있는 쓰레기가 자기 물건이라고 주장한 해당 민원인은 "내 물건을 왜 치우냐"고 따지며 쓰레기를 치우려는 공무원을 밀어 넘어뜨린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법원은 구청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쓰레기 수거 일정을 사전에 고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 쓰레기 수거집행은 법률상 요건과 방식을 갖추지 못했다"며 "공무원에 대해 폭행을 가했더라도 공무집행방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구 한 구청 1층 로비에서 반복적으로 "구청장 나와!"라고 고성을 지른 혐의로 기소된 민원인도 법원의 판단에 따라 법적 처벌을 피했다. 해당 민원인은 2020년 8월~10월 3회에 걸쳐 '강제철거 중단하라'는 피켓을 들고 청사 내를 배회하거나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소란을 피웠다.

검찰은 해당 민원인이 약 1시간 30분 동안 반복해서 소리를 질러 소음을 발생시키는 방법으로 공무집행을 방해했다고 판단했다. 반면 법원은 큰소리를 친 것만으로는 폭행으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소리를 지른 것은 자신의 주장을 듣게 하기 위해서"라며 "소음으로 공무원들에게 고통을 줄 의도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