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안동의 어느 명문고등학교에서 '유교문화의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강연을 앞두고 큰 걱정이 앞섰던 기억이 새롭다. 유교(儒敎)에 대한 천학비재(淺學菲才)도 그렇지만, 학생들이 지니고 있을 유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 때문이었다. 무언가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특강 제목을 '한류(韓流)의 원동력 유교'라고 바꾸면서 학생들의 관심을 유도한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을 휩쓰는 '한류의 원동력은 정녕 무엇일까'란 질문을 다시한번 던져본다. 그것은 망국과 광복 그리고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세계의 최빈국으로 전락했던 우리 한국이 어떻게 모두가 부러워하는 잘사는 나라로 급성장했는지, 그 저변의 정신문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물음과도 상응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류의 원천은 유교정신'이었다. 이를 반박할만한 논거가 있을까?
한류의 초창기 대명사는 드라마 '대장금'(大長今)이었다. '대장금'은 조선 중종 때 활동한 의녀(醫女) 장금(長今)의 삶을 재구성한 픽션이다. 궁중 암투에 휘말려 부모를 잃고 수라간 궁녀로 들어간 장금이 왕의 주치의인 최초의 어의녀(御醫女)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렸다. 이 드라마가 2005년부터 홍콩의 안방극장을 사로잡기 시작했을 때 중화권 언론은 격앙된 내심을 감추지 못했다.
한 논객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자강(自强)을 이뤄낸 한국의 역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 연구원은 "유교 전통문화의 정수가 진열된 박물관을 참관하는 느낌"이라고 극찬을 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의 지식인들이 발견한 한국문화 속의 유교이다. 중국 뿐만 아니었다. 드라마 '대장금'은 전세계로 파급되며 한류의 열풍을 이끌었다. 세계인들은 왜 '대장금'에 흠뻑 빠졌을까.
그것은 드라마에 녹아있는 한국의 역사와 사상적 가치가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공감을 얻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대장금'의 시대적인 배경은 16세기이다. 당시는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정치적 갈등과 혼란이 극심했던 위기와 혼돈의 시대였다. 드라마의 전개는 수랏간을 무대로 한 최상궁-금영 계열과 한상궁-장금 계열의 대립구도로 시작한다.
한상궁이 죽은 후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장금이 승리를 이뤄내는 과정은, 당시 개혁의 화신이었던 조광조가 희생된 후 사림세력이 세조의 왕위찬탈로 형성된 훈구파의 시대를 극복하는 것과 유사하다. 드라마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적 배경은 결국 유교적 이상주의였다. 우리가 '조선을 망하게 한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치부했던 그 유교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교는 결코 그렇게 단순한 사상이 아니다.
'유교는 천(千)의 얼굴을 가진 문화현상'이라고도 한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동양적 사유체계이다. 특히 남명 조식(南冥 曺植)과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유학은 역동적이고 실천적이었다. 우리가 조선의 유교관과 역사관을 이해하기 위해 영어 공부 시간의 1/100이나마 할애했더라면, 조상들의 역사와 철학을 그토록 부정하고 폄훼하는 못난 후손으로 살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명과 퇴계는 혼란에 빠진 16세기의 조선을 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한국 정신사의 거목이었다. 특히 남명의 개방성과 실천성은 놀랍다. 불교와 노장사상을 포용하며 병법과 천문 지리까지 섭렵했다. 남명의 등장으로 관념적·정태적 경향의 주자학이 역동성과 다원성 그리고 실용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남명의 유학정신을 역사의 무대에서 밀어내고 말았다.
퇴계 또한 당면한 조선의 현실에 대해 깊이 고뇌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신사상가였다. 퇴계는 소수 엘리트에 의한 급진적인 개혁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잇따른 사화(士禍)와 조광조의 실패가 남긴 교훈이었을 것이다. 퇴계는 학문과 교육을 통한 신진 개혁세력의 저변 확대에 주력했다. 퇴계가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에 주목한 것도 개혁의 방편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퇴계는 혼탁한 시대 문제의 본질을 '인간'으로 봤다. 그래서 '이기론'을 인간의 심성에 적용할 때 드러나는 논점에 대해 치열하게 고뇌하고 논박한 것이다. 퇴계는 위기와 질곡의 시대를 타개하기 위해 주자학을 창조적으로 변용했다. '기발이약'(氣發理弱)의 세태를 타파하기 위해 '기발이승'(氣發理乘)이란 미지근한 논리를 '이발기수'(理發氣隨)로 수정․보완하며 '이'(理)개념에 생명력과 능동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막상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당쟁(黨爭)과 공리(空理)에 매몰되었다. 조선의 유학은 개혁성과 실천성을 잃으면서 형해화의 길을 걸었다. 기어이 '망국의 사상'이란 빌미를 제공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교정신을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공론(公論)으로 재활용하지 못하고, 끝없는 이기(利己)와 탐욕의 수단으로 악용한 지배층의 공론(空論) 탓이었다.
유학의 본령은 그래도 사라지지 않았다. 16세기 조선의 유학은 17,18세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실학(實學)으로 거듭났고, 서구문명과 마주하며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19세기 민초들의 함성과 함께 동학(東學)으로 흐르던 유학은 제국주의가 창궐하던 20세기 전반에는 독립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1970년대의 경제성장과 80년대의 민주화를 이끈 정신적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의 한류는 보라. 다양한 K-문화의 물결이 지구촌에 넘실대는 경이로운 현상의 내면에는 학문과 교육의 가치를 강조하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회를 지향했던 유교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지 않았던가. 오늘날 파국적인 국론 분열과 사회 혼돈을 치유하기 위한 고유한 처방 또한 우리 유교문화의 정수(精髓)인 '선비정신'일 것이다. 유교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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