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재봉 칼럼] 미일동맹의 논리와 당위

입력 2023-09-17 17:34:58 수정 2023-09-17 19:03:21

‘한국 사람 만들기’의 저자

함재봉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의 저자

중국의 패권주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북한의 핵무장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이 전에 없이 강조되고 있다. 차제에 한미동맹과 더불어 우리 안보의 또 다른 축인 미일동맹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직후부터 1952년까지 7년간 일본을 점령하고 군정을 펼친다. 일본에 주권을 돌려주기 직전인 1951년 체결한 미일 방위조약은 철저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미국이 미일 방위조약을 불평등 조약으로 만든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일본이 재무장을 하는 것을 막는 것이요, 둘째는 일본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져서 미국의 끊임없는 개입을 요하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고, 셋째는 일본이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는 한편 일본의 재무장, 외교, 내치를 미국의 입맛에 맞게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전후 초대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미국이 일본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 군정으로부터 주권을 되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미군이 일본에 계속해서 주둔하도록 적극 협조하고 주일 미군에게 치외법권을 제공하는 것임도 알았다.

일본은 안보를 얻고 미국은 일본에 대한 통제권을 얻는 것이 미일 안보조약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안보만 얻은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미국 시장에 대한 무한대의 진출권을 확보하고 미국의 전폭적인 기술이전을 얻어 낸다. 반면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 속도와 그 내용을 제어할 수 있었다.

미일 안보조약의 또 하나의 특징은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더 많은 무장을 요구할 경우 일본이 이를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후 일본은 미국이 강요한 '평화헌법 제9조'를 미국의 재무장 압력을 거부하는 데 지속적으로 사용한다. 요시다는 자신의 회고록에 '미일 안보조약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다'고 술회한다.

요시다는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삼을 것을 예상했다. 미국이 일본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일본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대규모 정규군을 유지하는 대신 미국의 요구만 최소한으로 들어주면 얼마든지 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는 어느 정도의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 전략이었다. 사실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 전략의 핵심 기지로 사용할 것을 결정하기까지 미국 내부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을 창안했으며 1948년 당시 미 국무성 정책기획관이었던 조지 케넌은 미국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세력권'을 나눌 것을 주장했다. 소련과 협상에 성공하고 일본 내정만 안정되면 미군은 일본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49년 6월, 일본을 소련에게 넘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고 일본을 거점으로 동중국해, 남중국해, 동해로 통하는 북태평양의 무역 항로들을 모두 지킬 것을 결정한다. 미국이 6·25전쟁에 개입한 것은 전쟁 발발 1년 전 미국이 일본을 지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막상 미국이 일본을 지키기로 결정을 내리자 요시다는 미국이 일본을 버릴 것을 걱정하는 대신 원치 않는 전쟁에 끌고 들어가는 것을 걱정한다. 요시다는 일본 '자위대' 내에 해외 원정군을 창설하는 것도 거부한다.

안보에 있어서 이처럼 절묘한 균형점을 찾기 위해 요시다는 절묘한 정치적 곡예도 해야 했다. 일본의 재무장을 요구하는 보수주의자들과 기업가들에게는 재무장에 투자하는 대신 남는 재원을 모두 경제발전에 투입할 것을 설득한다. 좌파에게는 일본이 '평화헌법' 9조를 준수할 것을 약속한다. 공동방위를 위해 일본이 더 많은 기여를 할 것을 요구하는 미국에는 '일본은 자국의 안보에 대한 책임을 점차 더 많이 떠맡을 것을 약속한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의 전직 장교들과 35만의 병력을 가진 육군, 460만 톤의 군함을 갖춘 해군, 그리고 7천 대의 항공기를 갖춘 공군을 만들 계획을 한다. 요시다는 이를 모두 거부한다. 일본은 미국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고 오직 미국의 병참기지 역할을 함으로써 전후 복구에 성공한다.

전후 일본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확고한 안보를 가능케 하고 오늘날 한미동맹과 함께 우리의 안보를 지켜 주는 미일동맹은 이렇게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