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18>고상함과 상서로움을 화려하게 결합한 책거리

입력 2023-09-15 12:48:24 수정 2023-09-18 07:52:39

미술사 연구자

작가 미상, 책거리, 종이에 채색, 각 74.5×41.5㎝,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
작가 미상, 책거리, 종이에 채색, 각 74.5×41.5㎝,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

민화 '책거리' 8폭 병풍 중 2폭이다. 불투명한 하얀색 호분의 흰 빛이 정갈한 위에 화사한 색깔들이 다채롭고, 쌓아놓은 책과 책상 등은 자를 대고 반듯하게 그어 깔끔한 분위기가 고급스럽다. 모든 기물에 문양을 올린 점도 호화로운 장식미를 더한다.

책거리 그림은 서재의 풍경이다. 책과 문방구를 기본으로 한 격조 위에 고상한 장식품까지 있어 구경거리가 풍부한 데다, 상서로운 뜻을 지닌 꽃과 과일까지 그린다. 민화 중에서도 명작이 풍성한 장르인 것은 그만큼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책은 무늬 비단으로 포갑(包匣)한 중국책으로 그리면서 바닥에 쌓아놓았고, 문방구는 고동기(古銅器)에 꽂힌 두루마리와 두 자루 붓이다. 책상과 소반을 진열대로 활용해 귀한 물건을 늘어놓았다.

꽃은 오른쪽 폭에는 수양매인 홍매와 대나무 분재를 청동기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용기에 심어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고, 왼쪽 폭에는 커다란 국화꽃 두 송이가 달린 가지를 고동기에 꽂아 두었다. 사군자인 매화, 대나무, 국화를 아름다운 채색화로 그렸다.

과일은 참외, 수박, 석류다. 백자천손(百子千孫)을 상징하는 수박과 석류의 씨앗이 잘 보인다. 책과 책상은 평행투시도법을 살짝 적용했지만 소실점이 화면 밖으로 향하는 역원근법이어서 마치 나에게로 다가오는 듯하다.

그릇류는 화분이자 꽃병으로 사용된 청동기, 재질을 알 수 없는 주전자, 대나무와 매화가 선명하게 그려진 청화백자 병과 접시 등이다. 오른쪽 백자 병에는 술잔을 엎어 놓았고, 왼쪽 백자 병에는 산호가지를 꽂아 놓았다.

책거리 그림의 출발은 정조시대 궁중화원이 그렸던 산수, 매죽, 인물, 누각, 영모, 초충, 속화, 문방 중에서 문방에 속했던 '책가(冊架)' 주제의 그림이다. 궁중화원을 직접 감독했던 정조는 방대한 문집 '홍재전서'를 남긴 독서인이었고, 문방류 그림을 자주 출제했다. 책을 좋아한 정조는 이런 말도 남겼다.

정자이위(程子以爲) 수부득독서(雖不得讀書) 입서사(入書肆) 마사간질(摩挲簡帙) 유각흔연(猶覺欣然) 여유회어사언(予有會於斯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비록 책을 읽을 여유가 없더라도 서재에 들어가 책을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문방도(文房圖)인 '책거리' 병풍을 펼쳐놓았던 이 방의 주인은 학자는 아니었겠지만 그림으로라도 그런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조선은 국왕부터 서민까지 책을 가치 있게 여기고 학문을 숭상한 나라였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