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1000m 알프스 자연 속 고독은 신을 만나는 지름길이 되었다
지성을 울리는 장엄한 소리가 있는가하면, 영혼을 울리는 신비한 소리도 있다. 영국 시인이자 소설가 헬렌 마리아 윌리엄스(Helen Maria Williams)는 여성 운동가였고, 종교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진 여성이었다. 하지만 엥겔베르크 수도원을 방문한 후, 그녀는 가톨릭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 알프스의 깊은 계곡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오듯 엥겔베르크 수도원은 영혼을 울리는 맑고 신비한 소리가 있다.
◆ '천사의 '산' 엥겔베르크
엥겔베르크는 취리히에서 차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고, 고도 1000m의 광활한 알프스의 계곡 지대에 놓여 있다. 주위엔 3,239m의 높은 티틀리스(Titlis) 산과 빙하, 그리고 2,600m의 하넨(Hahnen) 산이 천사처럼 둘러싼 작은 봉우리들 사이에 우뚝 서 있다. 이곳은 겨울에서 봄까지 눈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곳을 찾았을 땐 한 여름인데도 스키장을 향하는 회전 곤돌라는 움직이고 있었다.
엥겔베르크는 '천사의 '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마을 이름도, 수도원 이름도 눈 덮인 아름다운 봉우리가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됐다. 우리는 중부 스위스의 가장 유명한 겨울 휴양지를 향해 달렸다. 엥겔베르크에 다다르자 즐비한 이정표에 길을 잃을 뻔했다. 우리는 좌우를 살피지 않고, 수도원 교회의 높은 종탑만 보고 전진했다. 그런데 눈앞엔 하나의 수도원이 아닌 두 개의 수도원이 서 있었다. 엥겔베르크와 수도원 역사를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이곳에 온 것인가.
엥겔베르크는 큰 타운이 아니라 동네 같았다. 작은 타운은 전통의 냄새와 더불어 이곳의 개성과 소박함이 묻어 있었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 19세기말부터 1차 대전 발발 전까지의 문화와 경제가 발전한 평화로운 시기를 말함) 시대에 지은 것 같은 가옥들이 있어, 과거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했다.
서쪽 언덕 아래 자리 잡은 수도원은 고요히 엥겔베르크 타운을 감싸고 있었다. 이곳에서 베네딕트 수도승들은 천년의 세월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도 기도하고 일하고 있다.
◆수도원 자체가 복음이고 복음 정신
엥겔베르크 수도원에 들어서자 수도원 역사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수도원은 1120년 셀렌뷰렌(Sellenbüren) 백작 콘라드(Conrad)가 설립했고, 첫 번째 수도원장은 아델헬름(Adelhelm)이었다.
그는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와 관련 있는 무리 수도원(Muri Abbey) 출신이다. 아델헬름은 수도원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교황과 황제로부터 비준을 받았고, 교황의 직속 수도원으로까지 지위를 높였다. 지방 군왕들이나 귀족들의 간섭으로부터 수도원을 지키는데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뿐 아니었다. 엥겔베르크 수도원이 시작부터 베네딕트 규칙을 따르게 된 것도 아델헬름의 역할 때문이었다. 그는 무리 수도원을 떠나 이곳으로 오면서 베네딕트 수도규칙서 한 부를 가지고 왔다. 그는 새롭게 시작하는 수도원의 하루를 베네딕트 규칙에 따르게 하고 싶었다. 아델헬름은 수도 공동체의 '규범'과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도원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도원 그 자체가 복음이고 복음의 정신이어야 한다.
수도원 정원을 걷다 문득 소설가 최명희의 '혼불'에 나오는 청암 부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고 다짐하면서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기 자리를 지켰다. 한 가문을 올곧게 세우려는 한 여인의 의지가 푸르게 날이 선 칼처럼 다가왔다. 우리 인생의 길도, 신앙의 길도, 살아 있는 정신과 강인한 의지가 없다면 썩은 동아줄일 뿐이다.
◆건물은 스러졌으나 정신은 혁혁히 남아
엥겔베르크 수도원이 세워진 후, 콘스탄스의 주교는 수도원 아래쪽에 수녀원을 지어 수도회에 봉사하도록 했다. 그런데 곧이어 수도원도 독립교회를 갖게 되어, 이곳에 두 개의 수도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305년 수도원이 화재로 완전히 소실돼 수도원과 교회를 다시 세웠다. 재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729년 8월 29일 대화재로 교회와 수도원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수도원장 임마누엘 크리벨리(Emanuel Crivelli)는 1740년에 초기 바로크 양식의 새 예배당을 건설했다. 그는 베네딕트 수도승들의 일상까지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다. 엥겔베르크 수도원은 이렇게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오늘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건물은 스러졌으나 정신이 혁혁히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수도원 건물은 거대했지만 단순하고 엄격했다. 녹색 정원과 하얀 수도원 건물의 대비는 신비로웠고, 수도원 정원에 핀 온갖 종류의 여름 꽃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수도원 정원을 돌아 수도원 교회를 향했다. 수도원 교회는 수도원 북쪽 끝자락에 외딴 집처럼 서 있었다. 대부분의 수도원은 건물보다 교회가 더 웅장하고 화려한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엥겔베르크 수도원 교회는 평범하다 못해 초라했다.
그러나 수도원 교회의 문을 열자 반전이 일어났다. 화려하고 밝은 로코코 양식의 장식이 확 다가오는 것이었다. 교회당 내부는 화려했지만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엥겔베르크 수도원 깊은 침묵과 신비가 나를 이끄는 것 같았다. 잠깐의 기도와 침묵이었지만 평온과 고요는 깊었다.
◆사본 제작 수도승은 예배까지 면제
수도원 교회는 볼거리가 많았다. 프레스코화, 많은 그림과 이콘, 그리고 유물들이 시선을 끌었다. 엥겔베르크 수도원은 니콜라우스 데 플뤼에(Nicolaus von Flue)의 '은둔 신비주의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그는 '말이 백합화를 먹는 꿈'을 꾼 후, 가정을 떠나 작은 움막에서 평생 기도하며 살았다.
니콜라우스는 말이라는 세상이 백합화라는 영적인 삶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적인 삶을 위해 평생 세상의 유혹을 벗어나 홀로 이웃과 세상을 위해 기도와 금욕으로 살아갔다. 니콜라우스는 15세기 사람이었지만 오늘날 스위스 사람들은 종파를 초월해 그를 존경한다. 심지어 개신교 작가 드니 드 루스몽(Denis de Rougemont)은 그의 삶에 대한 '희곡'을 썼다.
크리스토퍼 드 하멜(Christopher de Hamel)의 이야기처럼 중세 수도원은 '출판사'였다. 특히 엥겔베르크 수도원은 12세기 중엽 스위스 사본 제작의 중심지였다. 수도원장 프로윈(Frowin) 시절에 사본 제작소의 활동이 왕성했다. 그 당시 엥겔베르크 수도원에는 수도승 40여명, 수녀 80여명이 있었다. 사본제작은 4-5명의 필경사(수도승)들이 한조가 되어 사본제작에 참여했다.
사본을 제작하는 수도승은 수도 공동체의 일상 업무에서 제외시켜 주었다. 심지어 사본 제작에 참여하는 수도승들은 예배까지 면제해 주었다. 수도승이든 평신도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종교행위가 예배 아닌가. 책을 제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수도승들의 일상 노동과 예배까지 면제해 준단 말인가.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고, 계시는 책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책이 중요하단 말인가.
그곳 사본 제작소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 암브로시우스의 책, 신구약 성경 책 등이 제작되었다. 아직도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도 그곳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전집이 잘 보존돼 있다.
◆자연 속에서의 고독이 신을 만나는 지름길
늦은 오후 산책을 위해 수도원을 빠져 나왔다. 평화와 엄숙이 깃드는 시간에 나는 엥겔베르크 수도원 뒤편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엥겔베르크 산 중턱을 가로지른 산책로를 따라가자 수도원 학교가 나왔다. 조금 더 걸으니 회전곤돌라가 스키장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 티틀리스 산과 빙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엥겔베르크, 천사의 언덕'이란 시를 지었을까. 그는 무엇을 경험했기에 "내 눈이 처음으로 그 유명한 언덕을 보았을 때 신성한 엥겔베르크, 천상의 합창단"이라고 노래했을까. 그는 엥겔베르크를 "신성한 산", "빛나는 산"이라고 했다. 심지어 경건이 일어나는 산이라고 했다.
그는 종종 책보다 자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역전된 상황」(The Tables Turned)에서 "책들! 그것은 지루하고 끝없는 노력"이고, "자연이 너희 선생님이 되게 하라"고 했다. 시인은 자연에서 신을 보고, 신의 존재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엥겔베르크 수도원의 적막과 고요 속에서 신적 고독을 읽었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자연 속에서의 고독이 신을 만나는 지름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젊은 날 퍼니스 수도원(Furness Abbey), 프랑스의 그랑드 샤르트뢰즈(Grande Chartruse)을 찾았다. 그러나 시인은 엥겔베르크 수도원에서 그가 찾던 그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엥겔베르크 언덕 위 오솔길을 오가며, 나는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는지 자문해 봤다.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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