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구한말, 해방 전후 그리고 2023년 한국 외교

입력 2023-08-22 17:19:47 수정 2023-08-23 09:32:34

송신용 서울지사장
송신용 서울지사장

1905년 7월 가쓰라 일본 총리와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는 도쿄에서 만난다. 극비리에 머리를 맞댄 결과 두 나라는 대한제국과 필리핀 지배와 관련한 이해를 놓고 상호 구두로 양해하는 합의를 한다. 요약하자면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는 게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동아시아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각서 교환이었든 협정이었든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후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을 거쳐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이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포석으로 작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임박한 1945년 2월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휴양 도시 얄타, 연합국 소속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부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이 모여 전후 세계 질서를 논의한다. 얼마나 밀실에서 진행했으면 처칠이 "비밀로 하자. 전 세계가 우리 마음대로 자기의 운명을 재단한 걸 알면 매우 불쾌할 테니…"라고 했을까.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 대가로 한반도를 소련에 넘긴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승만은 밀약을 폭로해 미국의 해명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이 탁월한 외교 전략가도 끝내 38선 분할을 막지 못했다.

반전은 건국 이후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1949년 무초 주한 미국대사,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에게 과거 두 차례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혼쭐냈다. 미국 주도로 휴전 협정이 진행되고 있던 1953년 6월에는 약 2만5천 명의 반공 포로를 직권 석방하는 승부수로 한·미방위협정을 관철시킨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밑거름 삼아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성장한 대한민국 역사의 또 하나 토대를 만든 순간이었다.

최근 한국·미국·일본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의를 하고, 3국 협력과 공조 체제를 제도화한 건 의미심장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3국 협력 방향을 명시한 '캠프 데이비드 원칙'과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담은 '한·미·일 3자 협의에 대한 공약' 등 3건의 문서를 채택했다. 굴욕의 외교사에 비춰 볼 때 무엇보다 윤 대통령이 주도해 정례화한 게 두드러진다. 70년 전 만들어진 한·미 동맹을 미·일 동맹과 같은 수준으로 업그레이드시킨다면 무엇보다 북핵 대응에 유용할 것이다.

글로벌 경제가 휘청이는 상황에서 경제적 함의는 더욱 크다. 반도체·배터리·우주 산업 등 핵심·신흥 기술 분야에서 광범위한 3국 협력 플랫폼을 구축하기로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다. 우리로서는 저성장 늪에서 탈출하고 재도약할 절호의 기회다. 3국 경제 협력이라는 새 패러다임에 맞춰 규제 완화, 민간투자 확대 같은 정책 로드맵 마련과 발 빠른 실천에 나서야 할 때다. 한·미·일 대(對) 북·중·러의 대립 구도 따위야 현재로서는 정면 돌파하면 그만이다. 물론 3국의 반중(反中) 기조가 특히 명확해지면서 균형 외교를 역주행한다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

당장 중국은 "강한 불만과 단호한 반대를 표시한다"며 발끈하고 나섰다. 실제로 한·미·일 정상회담이 끝나기 무섭게 대만해협에서 군사훈련을 재개했다. 한·미·일 협력 구축의 1차 원인 제공자가 자신인데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같은 나라,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夢)과 함께하겠다"(문재인 전 대통령)는 헌사(獻辭)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미칠 노릇이겠다. 외교에 있어 어정쩡하게 회색지대에 있으려하다가는 양쪽에서 얻어터지기 일쑤라는 철칙을 잊어선 안 된다.

다만, 일본과의 관계 설정은 고도의 외교력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앞두고 국민 여론이 싸늘한 상황에서 한·미·일 3국 협력과 공조 체제의 당위성과 불가피성을 설득해 공감대를 넓히는 건 정부의 몫이다. 대척점에 있는 북·중·러 뿐 아니라 협력체제의 다른 한 축을 향해서도 할 말을 하며 국가의 이익을 이끌어내는 정교한 전략과 결기가 절실하다는 의미다. 한국은 더 이상 구한말·해방 전후의 약소국이 아니다. 자주·국익외교로 미래를 열어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