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침공으로 위기에 몰렸던 국군이 낙동강 마지막 방어선을 치고 적을 물리친 지역이 바로 칠곡 지역이다. 다부동 전투와 낙동강 왜관철교(현재는 인도교)폭파는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발목을 묶음으로써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승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과 국군의 많은 희생이 있었다. 호국 영령의 명복을 빈다.
영남의 3대 반촌(班村)이라 일컬어왔던 칠곡군 왜관읍 매원(梅院) 마을은 한 때 400 여호의 가옥을 이룰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6.25 전쟁 피해로 많은 한옥이 소실되어 현재는 60 여호의 고택이 남아있다. 지난 6월 매원마을이 전국에서 마을 단위로는 최초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영남의 3대 반촌,매원마을
매원이라는 지명은 옛날 이 마을에 원(院)이 있었고, 주변 형국(形局)이 마치 매화(梅花) 같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소학산(巢鶴山)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그 지형이 마치 매화나무같이 보이는데 석전(石田)은 매화나무의 뿌리, 매원은 줄기, 상지촌(上枝村)은 매화나무의 웃가지에 비유된다.
매원마을은 백호방 (白虎方,진을 치는 데 있어서 서쪽 방향)이 허하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심은 비보수(裨補樹,길지 중에서 기가 좀 부족한 곳에 나무를 한 그루 또는 여러 그루 심어 숲을 만들거나, 한 줄 또는 여러 줄을 줄지어 심어 조성한 숲.) 소나무(동솔밭) 10여 그루가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매화는 겨울철 북설 한풍에도 꽃을 피우는 모습에서 불의에 굴하지 않는 올곧은 선비의 기상과 절개를 상징한다. 또 꽃을 많이 피우니 자손이 번성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매화나무 형상의 양택 명당에 터 잡은 집안이 칠곡 광주이씨(廣州李氏) 문중이다.
광주이씨가 칠곡에 입향한 계기는 조선 연산군 초기에 좌통례공(左通禮公) 이극견(李克堅)이 성주목사로 재임 시 둘째아들이 부친과 함께 따라와서 관내의 만석 부호(富豪)인 영천최씨(永川崔氏) 최하(崔河)의 무남독녀 사위가 되어 웃갓에서 살게 되니 그가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이며 칠곡 입향조이다. 그 후 후손이 웃갓을 비롯하여 돌밭, 매원, 한실 등지에서 집성을 이루어 번성하였다.
광주이씨 문중은 희한하게도 영천최씨와 인연이 깊다. 고려 말 대학자인 둔촌(遁村) 이집(李集, 초명·원령)이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의 비행을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장차 화가 미칠 것을 예견하고, 벼슬과 학문으로 우의가 돈독했던 친구 영천 최씨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가 있는 영천(永川)으로 부친과 함께 피신하였다.
그러더 그곳에서 부친이 사망하자 천곡이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에 묘소를 쓰도록 배려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 있는 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로 알려진 광주이씨 시조 묘소이다. 이후 광주이씨 문중은 조선 초기 크게 번성하여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과 장원급제 인물 많이 배출
매원마을은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에 거주하던 입향조의 현손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가 아들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1603~1644)을 데리고 함께 매원으로 이거(移居) 한 후 이도장의 차남 박곡(朴谷) 이원록(李元祿·1629~1688)이 뿌리를 내려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영남지방의 대표적 동족(同族) 마을 중 한 곳이다.
이곳은 일명 장원방(壯元坊)이라고도 불리는데 석담의 후손들 중 문과에 장원등과(壯元登科)를 많이 하여 문향(文鄕)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연유하여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을 장원봉(壯元峰)이라 부른다.

석담은 아들 낙촌 이도장, 손자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1622~1680), 증손 낙애(洛涯) 이한명(李漢命·1651~1687)과 함께 4대 한림을 지낸 조선시대에서도 보기 드문 명문이다. 그 외 박곡 이원록, 정재(靜齋) 이담명(李聃命·1646~1701),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1736∼1820) 등이 문과 급제하고 문명이 드높았다.
석담은 영남 유림의 대가(大家)로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예문관응교·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석담의 둘째 아들이 이도장이다. 이도장은 종숙 이영우(李榮雨)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그가 이주한 곳이 석전(石田, 돌밭)이다. 163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이후 승정원 주서, 사헌부 지평, 홍문관 응교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도장의 장남 귀암 이원정은 문과 급제 뒤 성균관 전적과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 요직을 거쳐 형조·호조·공조·이조 4판서를 역임하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차자인 이원록의 호는 박곡이다. 1663년(현종 4)에 을과장원으로 문과에 합격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경상도관찰사, 예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입향조 및 석담 묘소의 음덕이 어우러진 명당
귀암의 장남 이담명은 현종 11년(1670)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냈고, 차남 이한명은 1699년(숙종 25)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홍문관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고 퇴계, 한강, 문익공을 잇는 성리학자 묵헌 이만운도 귀암의 후손이다.
그는 우리 국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한 바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수성을 비롯하여 후손들이 관계· 법조계·학계 등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이러한 칠곡 광주이씨 번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필자의 판단은 석담이 원래 살던 곳인 웃갓마을 경수당(敬守堂, 현·벽진이씨 후석파 종택)을 비롯하여 석전, 매원의 매화낙지형 명당 기운과 이 문중의 대표적 명당이라 할 수 있는 입향조 및 석담 묘소의 음덕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본다.

입향조 묘소는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산 중턱에 있다. 태양 금성체의 현무봉이 우뚝 솟고 청룡·백호가 창연(蒼然) 하니 많은 인물을 배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대명당이다. 흰 수탉이 횃대 위에서 울고 있는 백계등시형(白鷄登嘶形)의 형국으로 인좌신향(寅坐申向)의 자리이다. 상단에 입향조의 배(配) 영천최씨, 하단에 입향조 묘소 순서로 되어 있다. 점혈과 입향이 정확한 것으로 보아 명사 소점지이다. 안산이 멀리 있어 4~5대 이후 대발할 것으로 보인다.
석담의 묘소는 장원봉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인 지천면 송정리 도당골 산록에 있다. 이곳에는 총 5기의 묘소가 있다. 석담 종손인 이병구씨에게 확인 결과 상단 3기의 묘소는 윗대 묘소이다. 아래에서 2번째가 석담 묘소로 이곳의 진혈처이다.
그 하단에는 최근 이장으로 모신 석담의 배 인천채씨(仁川蔡氏) 묘소가 있다. 묘소는 봉황귀소형으로 계좌정향(癸坐丁向)의 명당이다. 청룡과 백호가 교과서 같이 좋은 모양으로, 특히 진방(辰方), 경방(庚方)의 무곡성(武曲星)이 일품이다.
세상사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천리에 순응하면 흥하고 거역하면 망한다고 하는 말이나 풍수지리 이치나 같은 맥락이다.

노인영 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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