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일본은 우리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 같다. 하나의 문제가 끝나면, 다른 문제가 뒤를 잇는다. 지난 10여 년간은 일본군 종군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의 배상 문제로 국교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한국통인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동경대 교수는 "일본의 방어선이 38선에서 쓰시마해협(대한해협)까지 남하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한국이 적국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2019년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 규제를 단행한 것도 그런 인식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올해 3월, 12년 만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며 극적으로 양국 관계가 개선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을 제3자 변제로 하겠다며 크게 양보했기 때문이다. 일본 전범 기업의 책임을 묻지 않고, 한국 기업이 출연한 재단에서 배상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영업사원이 결국 나라를 판 것"이라고 이 방안을 비판했다. 피해자인 양금덕(94) 할머니도 "정부의 추잡한 돈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분개했다.
하지만 어떤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하고 싶겠나. 지난 10여 년간 한일 양국의 어떤 정치 지도자도 나라에 필요하지만 인기는 없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어온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은 그동안 1965년 한일 협정 때 모든 배상이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당시 한국은 5억 달러의 청구권자금을 받았고, 배상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에 합의했다. 2005년 노무현 정부도 이를 인정하고, 2015년까지 정부는 징용 피해자 7만2천631명에게 6천184억 원을 지급했다. 그런데 2018년 한국 대법원은 "한일 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앞서 2017년 말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 때의 일본군 종군위안부에 관한 한일 간 합의를 파기했다. 이후 일본은 한국을 국가 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강력히 비판하며, 일체의 협상을 거부했다. 그 사이 북한은 핵무장을 완성했다. 미중 간 신냉전도 본격화되었다. 한국과 일본, 어느 나라가 홀로 이 거센 격류를 헤쳐 나갈 수 있나. 윤 대통령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하지만 올해 5월,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라는 새 지뢰가 터졌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핵 오염수 방류란 심각한 범죄행위다. 그러나 지난 7월 4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일본의 방류 계획이 국제 안전기준에 부합한다는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민주당은 '깡통 보고서'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과학적이고, 국제기준에 부합하고, 한국 전문가의 참여에 의한 검증이라는 3대 조건을 제시해 온 한국 정부는 IAEA의 결론을 수용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간담회에 참가한 한 고교생은 "일본에 나라를 갖다 바치려 하는가"라고 비난했다.
한국에 일본 문제는 시시포스의 고통이다. 올해 4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100년 전 일어난 일 때문에 일본에 사과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이성적 판단이다. 하지만 식민 지배의 상처는 생각 이상으로 깊다. 일제 때 투옥된 윤치영(1898~1996)은 84회나 고문을 당했다. 죽음의 문턱에 선 그는 "무자비한 식민 통치의 폭력 앞에, 나는 하루아침에 짐승이나 벌레만도 못한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짐승과 벌레라는 말이 가슴에 사무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힌 자의 절규다. 나라 없는 백성이란 그런 존재다. 일제는 단순한 통치를 넘어 한국인의 민족혼을 말살하고자 했다.
하지만 "한국의 안보 사안이 너무 시급해 일본과의 협력을 지연할 수 없다"는 윤 대통령의 인식 역시 절박하다. 정의와 현실이 치열하게 다툴 때 필요한 건 지혜다. "친구를 가까이 해야 하지만, 적은 더 가까이 해야 한다." 누아르 영화의 명작 '대부'의 명대사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그러면 판단력이 흐려져." 더욱이 오늘날 일본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법치의 가치를 공유하는 거의 유일한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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