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만국 통용의 치트키

입력 2023-08-10 20:27:36

김태진 사회부 차장
김태진 사회부 차장

중견 문인들이 주축인 온라인 카페에 매우 이질적인 글이 반복적으로 올라왔다. 대화명 'OO아빠'가 올린 글이다.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의 사진 두 장도 붙었다. 아이가 아파도 밤새 뜨거운 물을 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밥 사먹일 돈도 당장 없다는 내용이다. 아이의 비극을 확대해 내보인 것으로 보인다.

장문의 글 가운데 계좌번호가 적혀 있었다. 무릇 부모라면 쉽게 누르는 동정심 버튼일 법했다. 그러나 일부는 차가운 반응이었다. 아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석연치 않다는 의심과 대한민국 사회복지 시스템이 이렇게 엉망일 리 없다는 확신이었다.

2015년 9월 한 장의 사진이 세계를 얼어붙게 했다.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에이란 쿠르디가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아이가 이렇게 될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자책성 경직에 가까웠다. 에이란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터키 경찰의 모습은 삽시간에 타전됐다. 난민 수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영국은 물론 독일, 프랑스가 난민 수용 인원을 대폭 늘렸다. 난민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국내에서도 커졌다. '난민=쿠르디' 등식이 성립된 듯했다. '도덕적 책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최근 대한민국을 강타한 분노는 새만금 잼버리에서 촉발됐다. 수천억 원의 세금이 들어갔는데 해외 토픽이 될 정도로 이미지 추락을 거듭했다. 10조 원에 가까운 경제적 부가가치는 귓등으로 넘긴 지 오래다. 잼버리에 참가하러 온 아이들의 '한여름 생고생'은 분노의 깊이를 더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심정으로 잼버리를 보는 게 아니라 부모의 심정으로 아이들을 보는 것이다. 제아무리 한데서 자고 역경을 이겨내는 게 잼버리의 기본값이라 해도 생존 게임에 가까워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8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8일 국회에서 열린 '후쿠시마 핵 오염수 저지를 위한 아동·청소년·양육자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일 국회에서 '정치하는 엄마들'이라는 단체가 주최한 '후쿠시마 핵 오염수 저지를 위한 아동·청소년·양육자 간담회'가 열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민주당 의원 5명도 함께했다. 많아야 10살쯤 돼 보이는 아이들은 '어린이 활동가'라고 자칭했다. 저마다 그려온, 구호가 적힌 포스터를 들고 있었다. 설령 이벤트성 개그 쇼였다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심정이 될 텐데 간담회는 정자세를 하고 진행됐다.

주최 측은 아이들의 미래와 직결된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정치가 우리의 생활을 좌우할 수 있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이른 나이에 알게 되니 교육적 효과도 그만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피해와 고통을 제도 개선의 근거로 내세우면 만국 통용의 '치트키'를 쓴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이 자리에서 한 아이는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파도를 탔다. 그때 후쿠시마 바다를 생각했다. 내가 제일 싫은 건 우리나라 대통령이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는 걸 찬성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어린이 활동가'라는 조어가 멸칭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민주당 대변인은 "오염수 방류는 정쟁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건강,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이 부분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이 논리는 앵벌이 모녀와 얼핏 비슷하다. 아이를 도와 달라며,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구걸하지만 실은 앵벌이에 나선 내 주머니를 너의 돈으로 채워 달라는 의미다. 도움의 의미로 이들에게 빵을 내민다면 돈으로 주시면 안 되겠냐는 답이 돌아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