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혁 소설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해 전부터 친구들과 조금씩 멀어져버린 40대 P씨는 요즘 인스타그램을 즐겨한다. 일주일 전이었나? 화창한 봄날의 오전을 즐기기 위해 함께 브런치 카페에 가자는 문자메시지를 지인들에게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모두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섣부르게 메이크업까지 끝내 놓은 P씨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쌜쭉해진 표정으로 집 근처 네일숍을 찾았다. 요즘 행사 기간이라 2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손질해 준다는 광고문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손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핸들 위에서 봄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손톱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P씨는 근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잘 정돈된 손톱 사진을 찍었다. 벤츠AMG 로고가 새겨진 차키를 움켜쥐고 샤넬 클러치백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려 알록달록한 다섯 개의 손톱이 더욱 돋보이도록 신경을 쓴 사진 아래에는 '너무 맘에 드는 네일, 봄날의 소박한 행복, 내일 라운딩은 포기해야 하나? 원장님 쵝오! #소확행 #〇〇네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몇 해 전 퇴임한 H교수는 요즘 한창 수필 쓰기에 빠져있다. 그는 특히 소박한 일상적 단상을 매만져 하나의 사실적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수필의 장르적 특성을 잘 지킨 글쓰기를 실천하기 위해 애쓴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 새벽에 탈고한 '굿바이 나의 오래된 애마여'는 퍽 만족스러워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자신의 글을 읽었다. 오랜 교수 생활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그의 낭랑한 목소리로 엿들은 '굿바이 나의 오래된 애마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H교수는 얼마 전 뜻하지 않게 자신의 승용차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 승용차는 2000년대 후반 구입해 그의 마지막 출퇴근까지 함께 하였으니 H교수에게는 꽤나 세월의 정이 깊은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페이 닥터'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강남에 피부과를 개원한 H교수의 아들이 아버지의 차가 너무 낡았다며 '허락도 없이 차를 처분'하고(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최신형 독일 세단 한 대를 H교수의 명의로 '역시 허락도 없이' 선물해(이것 역시 가능한 일인지…) 버렸단다. 글 속에서 H교수는 그 차의 가격과 제원, 인테리어의 안락함과 첨단 안전장비 등의 우수성을 세세히 기술하면서 '골프도 치지 않는 나에게 이런 첨단의 이기(利器)가 다 무슨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옛 애마의 심하게 밀리던 브레이크를 추억했다. 이 대목에서 맥락 없이 골프가 소환된 것은 모이면 골프 이야기만 하는 지인들의 천박함을 꼬집는 그의 재치로 추정된다.
H교수는 한평생 지켜온 질박한 삶의 철학이 자신의 성공한 자식 농사로 인해 깨져버리고 말았다며 한탄했다. 물론 자신보다 더 큰 차를 타고 매주 골프를 치러 다니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화려함을 경계하고 '소박한 삶'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H교수는 떠나보낸 애마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모아 새 차를 타고 즐겨가던 순두부집으로 가 소박하고 따듯한 점심을 대접했다는 훈훈한 내용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의 저서 '자서전들 쓰십시다'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거나 그런 것에 자주 매달리는 사람들은 대개가 바깥 세계에서 자기 욕망의 실현에 실패를 하는 경향이 많은 쪽이기 쉽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중략)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 자기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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