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10> 파초의 관찰에서 이치를 깨치다

입력 2023-07-21 13:03:09 수정 2023-07-24 07:11:08

미술사 연구자

정선(1676-1759),
정선(1676-1759), '횡거관초(橫渠觀蕉)', 비단에 채색, 29×23.4㎝, 왜관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소장

7월이면 대구 남산동의 백년학당인 문우관에 파초가 무성하다. 바야흐로 파초의 계절이다. 신선의 부채, 선선(扇仙)이라고 했던 늘씬한 초록 잎은 햇빛 쨍한 여름날 절로 마음을 청량하게 한다. 파초는 우리나라에 자생하지 않는 온대성 대형 초본식물이어서 월동에 정성이 들지만 예나 지금이나 파초를 사랑해 애써 가꾸는 분이 많다.

파초는 옛 그림에 종종 나온다. 이국적이고 멋스러운 자태에 문화적 상징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정선의 '횡거관초'는 파초에 부여된 철학적 의미를 알려주는 작품이다. 두 그루 파초 사이에 한 인물이 앉아있고 그의 앞에 흰 종이, 붓, 벼루, 연적 등 필기도구가 가지런히 펼쳐져 있다. 제화에 '훤초청송(萱草靑松) 하불일변(何不一邊) 횡거(橫渠) 겸재(謙齋)'라고 해 횡거 선생으로 불리는 장재를 그린 고사인물화임을 알 수 있다.

장재는 성리학의 선구를 이루는 철학자로 주돈이, 소옹, 정호, 정이와 함께 북송오자(北宋五子)로 불린다. 파초 사이에 장재를 그린 것은 '파초'라는 그의 시 때문이다.

파초심진전신지(芭蕉心盡展新枝)/ 파초는 심(心)이 다하면 새 잎을 펼치는데

신권신심암기수(新卷新心暗己隨)/ 새로 말린 새 심(心)이 어느새 뒤따른다

원학신심양신덕(願學新心養新德)/ 새 심(心)이 생기는 것을 배워 새 덕(德) 기르길 바라니

선수신엽기신지(旋隨新葉起新知)/ 새 잎이 따르는 것처럼 새로운 앎이 일어나기를

장재는 파초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래서 한 이파리가 다 펼쳐지면 그 속에 말려 있던 심(心)에서 새잎이 뒤따라 솟아나오고, 그 이파리가 다 펼쳐지면, 그 속에서 또다시 새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없이 이어지며 펼쳐지는 파초 잎의 생태에서 장재는 자신의 덕(德)과 지(知) 또한 파초처럼 계속 새로워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통찰을 시로 설파한 것이 '파초'다.

장재의 시로 인해 파초에는 개별 사물에서 파악한 자연의 이치를 이념적 인식으로 확장하는 매개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조선의 학자들은 정선의 '횡거관초'에서 장재의 관물찰리(觀物察理)를 떠올렸다.

탐구의 대상인 파초는 무성한 초록 잎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그렸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돋우는 괴석은 수묵으로 대강대강 그렸다. 제화 8글자는 쉽게 풀어지지 않는데 비단 장재가 관찰한 파초뿐만 아니라 "원추리와 푸른 소나무인들 어찌 하나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격물치지의 대상이 아니겠는가?"라는 뜻일 것 같다.

미술사 연구자